- 이제니, 《새벽과 음악》
B52.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오는 글 / 《새벽과 음악》 - 이제니, 시간의 흐름
이 책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일기인지, 수기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예,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읽다 보면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도 있고, 역시 에세이로구나 싶기도 하고, 어쩌면 일기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시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그래서 더욱, 참 좋습니다.
꼭 어떤 글이 특정 장르에 속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글이기만 하다면, 그래서 문학이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넉넉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니, 문학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글이기만 하다면, 그 글이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오는 글이기만 하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런 글이야말로 읽는 이를 어떤 방식으로도 억압하지 않을 터이니까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소설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독자를 억압하고, 시는 시의 방식으로 독자를 억압하고, 에세이는 에세이의 방식으로 독자를 억압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글의 형식은, 또는 모든 형식의 글들은 독자를 억압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어떤 글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어떤 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읽는 이를 자유롭게 놓아줍니다.
그냥 읽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글을 오래도록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 내가 이런 글을 오래도록 기다려왔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았다고 하면 될까요.
저자가 파리 시내에 있는 몽파르나스 묘지를 찾았을 때의 감흥을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풀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라고 표현한 대목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굴드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녹음한 이 곡이 청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피아노 소리 그 자체로라기보다는, 연주 도중에 환청처럼 들려오는 굴드의 신음 같은 육성으로라는 사실을요.
아, 그렇다면 믿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세상과 인간과 사물의 숨은 비밀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눈이 말입니다.
예, 우리는 그런 저자의 눈을 따라 세상과 인간과 사물을 새롭게 보고, 깨닫고, 느끼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오래전 고등학교 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처음 읽은 뒤로 간절히 기다려왔던, 그 기다림의 세월이 하도 길어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내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우물의 수면을 살짝 건드려 오래도록 사라지 않는 잔잔한 파문을 그려주는 또 한 권의 책을 이제야 만났다는 느낌―.
참으로 오랜만에 반가운 마음으로, 또, 오랜 갈증 끝에 시원한 생수를 마시는 기분으로 읽은 책입니다.
릴케가 시인이었듯, 이 책의 저자도 시인입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아니, 그 마지막 한마디마저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고 가장 가깝다.’
그렇습니다. 이 책에 담긴 것은 세상과 인간과 사물과 더불어 바로 나 자신을 그윽하고 깊숙하게 들여다보도록 하는 글들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주고 싶지만, 동시에 오직 나 혼자서만 알고 있고 싶기도 한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