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권태, 〈우리 형〉
C63. 가혹한 운명의 이름, 우리 엄마 - 안권태, 〈우리 형〉(2004)
제목이 알려주는 것, 그 이중성
영화의 제목은 흔히 그것으로 대변되는 주제나 스토리의 핵심 국면을 설명하고 암시하는 구실을 하지요.
따라서 ‘우리 형’이라는 제목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 영화가 ‘형’과 그 형을 형으로 부르는 ‘동생’ 사이의 이야기임을, 적어도 스토리의 축이 그 형제 두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하지만 제목은 역시 똑같은 이유로 해당 영화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의 구실도 합니다. 동전이 두 개의 면을 동시에 갖듯, 세상의 모든 서사물 또한 표면의 이야기와 이면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지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대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이면에 감추어져 있기 십상입니다. 예술적 차원에서 이는 거의 고의로 감행되는 사태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 오해는 의도된 것으로서, 오해가 오해임을 깨닫는 순간 관객이 느끼는 신선한 충격이 그 목적인 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제목의 속성은 이중적입니다. 관객으로서는 이 두 겹의 국면을 모두 헤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형제의 이야기, 또는 어머니의 이야기
이런 노력에 근거하여 파악해 보건대, 이 영화는 겉으로는 형제의 이야기지만, 그 이면은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곧, 저는 형제보다는 어머니가 더 중요한 인물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 영화를 형제의 이야기로만 규정하는 것은 전적인 오해이거나, 기껏해야 절반의 이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심은 이 형제와 어머니로 이루어진 가족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의 내용이니까요.
어째서인지, 이 영화가 나오던 무렵의 한국영화들 속의 가족은 결손가정인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결손’이라는 표현조차 이제는 금기어가 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가족〉(2004, 이정철)과 〈귀신이 산다〉(2004, 김상진)의 가족은 어머니가 없었고, 〈슈퍼스타 감사용〉(2004, 김종현)과 〈꽃 피는 봄이 오면〉(2004, 류장하)의 가족은 아버지가 없었지요.
지금이라고 양상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합니다. 예컨대, 〈그것만이 내 세상〉(2018, 최성현)에서는 두 가족, 그러니까 이병헌네와 한지민네는 모두 아버지가 부재하는 가족이었지요.
〈우리 형〉도 아버지가 없는 한 가난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형은 여러 차례의 수술로도 완치를 보장하기 어려운 구순구개열(口脣口蓋裂)의 장애인입니다. 참 어려운 처지지요. 아니, 그야말로 최악입니다.
한데, 문제는 이런 몹쓸 형편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가족 구성원 가운데서는 오직 어머니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딱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하는 이 어머니에게 가없는 삶의 무게가 통째 얹히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 어머니의 선택은, 자기 신세를 비관하여 일가족 동반자살을 기도하거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스스로를 유기하듯 출분해 버리지 않는 한, 결국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험난한 세상과 맞서는 길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삶의 방식과 성격이 결정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입니다.
어머니가 살아가는 방식
영화는 이를, 이 어머니가 세상보다 더 험하고 모질게 스스로를 무장하는 모습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자기 아들보다 더 심한 중증의 장애인을 아들로 둔 이웃 여자한테서 가혹하리만큼 냉정하게 일숫돈을 받아내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동병상련의 미덕조차 이 어머니는 제 가족을 위해서 미련 없이 내던진 셈입니다.
하지만, ‘10억 만들기’와 같은 돈벌이 열풍이 무슨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던 영화 개봉 당시의 세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세대와 시대를 막론하고 온갖 불평등구조가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는, 또는 계속 형성되어 가고 있는 이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을 극복하고 계급과 신분의 상승을 이루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가난의 심화를 막는 일만도 벅찹니다. 그게 엄연한 현실이지요.
요컨대 아무리 이 어머니가 자기 본성에 반하는 악행을 불사하면서까지 결사적으로 발버둥을 쳐도 끝도 없이 거듭거듭 수술비를 마련함과 동시에 두 아들을 똑같은 수준으로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어머니는,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듯, 결국 둘 가운데 한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된 자식과 선택되지 못한 자식
여기서 선택된 자식과 선택되지 못한 자식 사이의 갈등이 발생함은 필연적입니다.
이 갈등이 뒷날 형제들 사이에 좁히기 힘든 계급 격차를 빚어내고, 나아가 자식 하나 뒷바라지하는 데 모든 것을 소진하느라 노년을 대비하지 못한 부모를 부양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형제들 간에 또 다른 비극적인 불화를 초래함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스토리의 전형 아닙니까.
그래도 영화는 적어도 겉으로는 이 속절없는 선택에서 소외된 아들, 곧 동생에게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얹어둡니다. 어머니(김해숙)의 일방적인 총애를 받는 형(신하균)과 그 총애로부터 소외되어 형한테 질투를 느낌과 아울러 어머니를 원망하는 동생(원빈) 사이의 갈등 국면에 집중하는 것이지요.
더 좁히면 동생의 감정이 이야기의 주요한 기둥인 셈입니다. 따라서 표면적인 주인공은 동생입니다. 이야기의 굴곡과 맞대응하는 것도 동생이 겪는 감정 기복의 양상이고요.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동생에서 시작하여 동생에서 끝납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형은 동생이 연루된 사건이 빌미가 되어 비명횡사(!)하고, 어머니는 그 아들을 잃은 충격을 못 이겨 인사불성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머니, 그 가혹한 운명
하지만 이 동생의 질투나 원망 따위는, 그 복합적이고 극심한 정도를 근거로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어머니가 놓인 처지의 절박함에 비추어보면 그저 한가롭고 철없는 아이의 투정 정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 스스로를 모질게 닦아세워 세상과 맞섰던 어머니의 좌절이, 죽은 형을 마지막 순간 눈물로 회상하는 동생의 감동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형을 잃은 동생의 슬픔을 압도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 땅의 가족주의가 그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아프도록 애처롭고 슬픈 것 또한 그것이 도무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머니라는 존재의 그 가혹한 운명적 비극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