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맘마미아!〉 & 〈브로큰 플라워〉
C65. 중년 여자와 중년 남자, 절치부심과 자업자득 - 필리다 로이드, 〈맘마미아!〉(2008) & 짐 자무시, 〈브로큰 플라워〉(2005)
그녀와 그의 차이점
〈맘마미아!〉와 〈브로큰 플라워〉는 기묘한 짝패입니다.
정확히는, 메릴 스트립의 모습에 빌 머레이의 모습이 오버랩으로 겹친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동시에 〈맘마미아!〉의 메릴 스트립에게는 허락되는 해피엔딩이 왜 〈브로큰 플라워〉의 빌 머레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오버랩으로 겹친다고 해서 메릴 스트립과 빌 머레이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메릴 스트립은 여자고, 빌 머레이는 남자입니다. 또, 메릴 스트립은 ‘분명히’ 엄마고, 빌 머레이는 ‘어쩌면’ 아빠입니다.
그러니까 메릴 스트립은 ‘분명히’ 딸의 엄마고, 빌 머레이는 ‘어쩌면’ 아들의 아빠입니다.
하지만 메릴 스트립은 남편 없이 홀로 살며 딸을 길렀지만, 빌 머레이는 홀로 살지 않았으며, 아들을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한 차이점입니다.
그녀와 그의 공통점
다음은, 다소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만, 분명한 공통점입니다.
메릴 스트립도 한 남자에게 충실하지 않았고, 빌 머레이도 한 여자에게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메릴 스트립에게는 적어도 세 명의 남자가 있었고, 빌 머레이에게는 적어도 네 명(줄리 델피까지 합하면 다섯)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 다 중년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중년의 후반부, 또는 노년으로 들어서는 문턱이지요. 아마 ‘초로’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또는 돌아보게 된다고들 말하는 시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찌 되었든 결국은 자식 때문입니다.
메릴 스트립은 ‘결혼을 앞둔’ 딸 때문에 자기 과거를 돌아보게 되고, 빌 머레이는 ‘혹 있을지도 모르는’ 아들 때문에 자기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둘의 과거는 모두 그들이 젊은 시절에 ‘저질렀던’ 소행, 곧 사랑 또는 연애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결혼을 앞둔’과 ‘혹 있을지도 모르는’은 각각 〈맘마미아!〉와 〈브로큰 플라워〉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음악으로 치면 일종의 ‘시도동기(示導動機)’ 또는 ‘지도동기(指導動機)’와 같은 것입니다.
딸의 결혼이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 닥쳐와 있기에 메릴 스트립은 자기 과거의 남자들 곧 ‘사랑들’과 만나게 되고, 자기 아들이 혹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과거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기 아들을 낳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눈앞에 닥쳐왔기에 빌 머레이는 확인차 자기 과거의 여자들 곧 ‘사랑들’을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이 두 느닷없는, 그러나 필연적인 사건들에서부터 두 영화는 각기 시작합니다.
너무도 다른 분위기
차이점과 공통점 사이, 많은 차이점만큼이나 많은 공통점―.
그런데도 이 두 영화의 분위기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너무도 다릅니다.
물론, 한쪽은 ‘뮤지컬(또는 합성어로서 무비컬)’이고, 다른 한쪽은 ‘드라마’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기본적인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지만, 그 결말까지 왜 이렇게 다른가는 아무래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이지요.
달라도 왜 굳이 이 정도까지 달라야 하는가―.
역시 이는 자식을 길러야 하는 책임을 ‘어찌 되었든’ 수행한 쪽과 ‘어찌 되었든’ 그러지 않은 쪽의 차이에 기인하는 결과일까요.
여기서 저는 하릴없이 중년 여자의 행복과 중년 남자의 불행이라는 차원에서 자꾸 이 두 영화의 결말을 새겨 읽게 됩니다.
절치부심과 자업자득
예컨대, 황혼이혼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혼이 어느 한쪽에만 해당하는 사건이 아님에도,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황혼이혼으로 말미암은 불행은 아무래도 여자 쪽보다는 남자 쪽의 몫인 느낌이 짙습니다.
요컨대 지금은 황혼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남자에게는 분명히 어느 만큼은 공포가 되어가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게’ 지나치지는 않지 않을까요.
아내로, 또 어머니로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여자들이 자식들 다 결혼시킨 다음 남편이 퇴직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 감행하는, 또는, 감행한다는 이혼―.
이제는 바다 건너 이웃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요, 이 땅에서도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형편이지요.
한데, 이것은, 어찌 되었든, 여자들에게는 절치부심이요, 남자들에게는 자업자득의 느낌이 짙습니다. 어쩐지 우선은 남자들이 그만큼 지은 죄가 많다는 뜻으로 새겨지거든요. 적어도 그런 혐의, 또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빛나는 중년과 처량한 중년
아마도 이 ‘죄’ 때문이겠지요. 〈브로큰 플라워〉의 빌 머레이가 그토록 처량하고 남루해 보이는 것은요.
그러니, 〈맘마미아!〉의 메릴 스트립이 〈브로큰 플라워〉의 빌 머레이와는 정반대로 마침내 사랑을 거머쥐고 행복해지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인생에 대한 당연한 보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릴 스트립은 자기 책임을 방기하지 않고 어쨌든 성실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빌 머레이의 처량한 중년을 메릴 스트립의 빛나는 중년과 견주어보는 것이 온당한 처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서글픈 느낌이 드는 것만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이쯤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꼭 가부장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삶이란 결국 남자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만든다’라는 표현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만든다’가 맞다면 남자들은 이 ‘죄’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만드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뜻일 터이니까요.
자업자득의 남루함
하지만 이 ‘죄’는 어찌 되었든 기본적으로 자업자득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업자득이라고 받아들여야 그 굴레에서 벗어날 여지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죄’ 자체가 불성실과 부도덕의 결과일진대, 이것이 자업자득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다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왜냐하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런 삶의 틀 자체가 결국은 남자들의 손으로 빚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이 말 자체 때문에 또 한 겹 더 서글퍼지네요. 우리네 삶이란 이토록 처량하고 남루한 것인가, 싶어서요.
이 두 영화의 ‘대비’가 참으로 선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