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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7.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걱정

  - 올리버 스톤, 〈월드 트레이드 센터〉

by 김정수 Feb 12. 2025

C67.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걱정 - 올리버 스톤, 〈월드 트레이드 센터〉(2006)

그날 벌어진 일의 정체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아니, 미리 알기는커녕, 그 어떤 일이 과연 어떤 성격의 일인지나 알 수 있었을까요?

   기실, 그날 벌어진 일이 대관절 어떤 일인지조차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그날 그 사건이 터진 현장에 인명 구조를 위해서 출동한 경찰들이라고 그것이 어떤 일인지 알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단 두 사람만이 그 참사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아니, 벌어진 일이 무슨 일인지를 도무지 몰랐기에 그들은 위기에 빠진 인명을 구조해야 한다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하나도 수행하지 못한 채 그들 자신부터가 힘 한 번 못써보고 너무나 허망하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고작 스무 명

   수천의 인명이 그렇게 느닷없이 스러져갔습니다.

   아니, 이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집계는 아닙니다. 실제로 정확하게 몇 명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파악해 낼 방도가 없는 것이지요.

   21세기, 인류가 이룩해 놓은 기술문명의 수준이 고작 그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한데, 어처구니없게도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그 거대한 두 개의 탑이 무너진 현장에서 구조된 사람은 단 스무 명―.

   기왕에 우리가 했던 비슷한 경험, 바로 저 삼풍백화점 참사 때의 사망자와 구조된 인명의 수를 감안한다면, 월드 트레이드 센터 참사 현장에서는 적어도 백여 명은 살아남았어야 하건만, 실제로는 고작 스무 명만이 다시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구조된 스무 명 가운데 열여덟 번째와 열아홉 번째로 구조된 두 사람의 경찰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실화입니다.


카메라가 머무는 곳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화가 바탕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영화가 그 두 명의 경찰한테 시종일관 끈질기게 집중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는 그 두 명의 경찰을 덮어 누른 그 부서진 건물 더미 아래의 짙은 어둠 속에 오래도록 머뭅니다.

   관객은 갑갑합니다.

   천하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줄곧 돌 더미에 깔린 채 옴짝달싹도 못 하고 누워만 있으니,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이 갑갑함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폐소공포증으로 변합니다. 숨이 막히고 암담합니다.

   이 절망적인 호흡곤란을 그래도 어쨌거나 러닝타임 동안 견딜 만한 것으로는 만들어야 하겠기에 카메라는 선심 쓰듯 이따금 바깥세상으로 나갑니다.


즉물적인 고통과 정서적인 고통

   하지만 그 바깥세상이란 또 다른 의미에서 관객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건물의 잔해 밑에 깔린 두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관객에게 즉물적인 고통을 강제한다면, 카메라가 이따금 나가는 바깥세상은 정서적인 고통을 강제합니다.

   거기는 다름 아닌 그 두 경찰의 가족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어두운 폐허 밑에 깔려 있는 두 경찰과 그들의 생사 여부를 몰라 애타는 근심에 휩싸인 가족들을 오가며 관객의 심신을 괴롭히는 일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쪽을 보아도 관객은 괴롭기만 합니다. 언제 구조될 수 있을지, 아니, 언제가 되든 구조 자체가 될 수나 있을지,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닌지, 관객은 그 두 경찰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각기 그 두 경찰을 남편이요 아들이요 아버지로 둔 가족들이 그 둘의 구조 여부는커녕 생사의 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조바심치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더불어 애가 타 당장 구조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어집니다.

   결국 이 영화가 착목하는 곳은 바로 이 두 가지 고통입니다.

   요컨대 이 고통이 참사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이 주장을 위해 영화는 테러리즘에 대한 어떠한 학구적인 분석도, 이 테러의 정치적인 배경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깡그리 배제합니다.


스펙터클에 대한 절제

   무엇보다도 스펙터클에 대한 절제는 거의 강박적입니다.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재난영화 특유의 거창한 구경거리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오로지 실망만을 안게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관객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모종의 심리적 고통에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목표입니다.

   시달리면 시달릴수록 관객은 이 참사 자체의 끔찍스러움에 치를 떨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노와도 다르고, 증오와도 다릅니다.

   누가 이 가공할 만한 테러를 저질렀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무슨 절박한 이유가 있었는지, 거기에 얽힌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어떠한지, 테러와 관련한 부시 행정부의 진정한 속셈은 무엇인지 따위는 이미 관심 밖입니다.

   오로지 그 두 사람의 구조 여부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두 가족들이 안심하고 다시 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만을 관객은 고대할 뿐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걱정

   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걱정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순간 전부 다 이 참사를 직접 겪지 않은 이들의 몫일 뿐입니다.

   그 당사자들, 그 두 경찰과 그들의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들이, 아버지가 구조되었다는 소식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감독 올리버 스톤은 정확히 이 지점까지 영화를 끌고 간 다음 멈춥니다.

   하지만 영화는 멈출지라도 관객은 이 지점에서 새로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이 인간적인 걱정이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걱정이 출발점이라는 사실―. 여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가 놓여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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