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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8. 사심을 버린 감동

- 권형진, 〈호로비츠를 위하여〉

by 김정수

C68. 사심을 버린 감동 - 권형진,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

두 종류의 영화

세상의 영화들을 다음과 같이 두 종류로 나누어보면 어떨까요. 하나는 심금을 울리지는 않아도 쓸거리가 많은 영화, 또 하나는 보고 얻는 감동으로 충분하여 굳이 그에 대한 글을 쓸 필요가 없는 영화, 이렇게 둘로 말입니다.

영화 평론을 포함하여 영화에 관한 글의 한 맹점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로서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것이 영화 자체의 감동까지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니, 어떤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영화에 관해 누군가가 쓴 글을 먼저 읽는 것은 자칫 드물게만 체험할 수 있는 나만의 감동을 미리 도난당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쏟아져 나오는 리뷰들은,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필자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고 충분하게 개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 견해의 상당 부분은 필자 개인의 취향에 기반합니다.

요컨대 속고 싶지 않다면 읽지 말고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보고 감동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굳이 글을 찾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영화에 관한 글을 영화와 관객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물로서 꼭 필요로 하거나, 애초부터 그런 매개물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영화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요.

영화 보기에서는 감동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여기서 평론과 에세이의 구분도 얼마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론이냐, 에세이냐

매우 거칠고 치우친 견해일 수도 있지만, 굳이 일목요연하게 평론과 에세이를 구분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째, 평론은 품평이지만, 에세이는 감상(感想)이자 감상(鑑賞)이다―.

둘째, 평론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기는 누군가가 낮은 자리에 있다고 여겨지는 독자들을 어쩌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글이지만, 에세이는 독자에게 정중하고 겸손하게 자기 생각이나 견해를 고백하고, 그에 대한 동의를 구하거나 대화를 청하는 글이다―.

셋째, 평론은 지식과 감식안을 과시하거나 강요하는 글이지만, 에세이는 감동을 함께 나누자고 권유하는 글이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평론의 태도로 접근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성격의 영화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입니다.

영화 미학의 견지에서 특별히 지적할 만한 새로운 요소가 눈에 띄지는 않는데도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보는 이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하늘 아래 아무것도 새롭지 않다면, 중요한 것은 조합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어떻게 엮을 것인가가 열쇠라는 뜻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이 영화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제간의 성공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스승이 자기 제자를 훌륭하게 키워내는 이야기―.

누군가가 자기 야망을 이루고자 무던히 노력하여 마침내 성공하고야 마는 입지전은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성공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의 하나일 터이니까요.

그 가운데서도 스승이 제자를 가르쳐 훌륭한 인물로 길러내는 이야기가 특히 더 감동적인 까닭은 거기에는 사심이 끼어들 여지가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적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사심이 끼어들지 않은 사제의 이야기가 가장 감동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도 시작은 사심에서

처음에는 사심(私心)에서 시작합니다.

여기,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으로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탓에 인정받는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할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를 지닌 여인 지수(엄정화)가 있습니다.

또, 절대음감이라는 천재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부모를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는 끔찍한 불행을 겪은 뒤 무도한 홀 할머니 슬하에서 한갓 말썽쟁이로 커가고 있는 소년 경민(신의재)이 있고요.

지수가 이 경민에게 온 힘과 정성을 다해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은 결국 이를 통하여 자신이 못다 이룬 욕망에 대한 대리만족은 물론이고, 피아노 교사로서 유명세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려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고 타산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심이 끝나는 지점

하지만 둘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지간을 뛰어넘습니다. 그 뛰어넘는 지점은 바로 지수가 경민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이는 야망이 사랑으로 바뀌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이제 지수는 경민에게 더는 피아노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입니다.

경민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피아노가 아니라 엄마이며, 스파르타식의 가르침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이라는 인식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바로 전체 이야기의 분수령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사심의 완전한 말소를 의미할까요?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이 바로 이 대목에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감동이 바로 여기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심의 말소

하지만 사심이라면 엄마의 사심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나친 교육열에 시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 막무가내의 사심에 희생되는 자식의 이야기는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심으로 어두워진 눈에 자식이 타고난 진짜 재능이나 재주, 또는 잠재력은 결코 똑바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이 사심은 자식을 망치는 원흉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까요.

요컨대, 경민에 대한 지수의 사랑은 우선은 피아노 선생님으로서 지녔던 애초의 사심이 말소됨을 의미하는 동시에 엄마로서 품었던 사심의 말소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놀랍다는 것입니다.


사심을 버린 엄마

지수와 경민의 관계가 단순한 사제 관계에서 모자 관계로 발전한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지수는 경민에게 어쨌거나 진짜 엄마가 아닙니다.

지수는 경민을 양자로 맞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럴 뜻도 없으며, 그럴 형편도 못 됩니다.

그런데도 경민에게 지수는 분명히 엄마입니다.

한데, 이 엄마가 놀랍게도 아들을 떠나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 순간 지수는 엄마로서 지니고 있었던 마지막 사심마저 버린 셈입니다.

해외의 유력자에게 입양된 경민이 마침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김정원)로 성공하는 결말이 어쩌면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매우 과장된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에도 여지없이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바로 이 탓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국의 한 빈한한 광산 노동자 가정의 막내아들이 천신만고 끝에 로열 발레단의 어엿한 발레리노로 성장하여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을 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인 〈빌리 엘리어트〉(2000, 스티븐 달드리)와 다른 길을 간 것입니다. 또는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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