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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6. 영화와 소설, 그 행복한 고민의 지점

- 코노 케이타, 〈츠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by 김정수

C66. 영화와 소설, 그 행복한 고민의 지점 - 코노 케이타, 〈츠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2006)

소설은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이선희 옮김, 창해)인데, 영화는 〈츠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으로 표기되어 있네요. ‘쓰'와 ‘츠'의 차이―.


원작 소설과 영화

소설이 있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있는 경우, 독자로서 또는 관객으로서 항상 부딪히게 되는 고민은, 소설을 먼저 읽을 것이냐, 아니면 영화를 먼저 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소설과 영화를 동시에 읽거나 볼 수 없다는 데 기인하는 필연적인 고민입니다. 역시 시간하고 관련된 고민이지요.

어쩌면 세상에 널린 그 많은 고민에 견주면 매우 행복한 고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라는 데 곤혹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순서가 어떻든, 소설과 영화를 모두 다 접했을 때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동등한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참 드물다는 것입니다.

대개는 어느 한쪽이 만족스러우면 다른 한쪽은 불만스럽기 십상입니다. 매체가 다르니 어느 만큼은 견줌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이런 현상은 좀처럼 피하기 힘듭니다.

결국 불만스러운 쪽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입니다.

그래서 이런 심리가 작동합니다.

먼저 접한 쪽이 만족스러울 경우 나중에 접한 쪽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려는 심리 말입니다. 실망하게 될까 싶어 두려운 것이지요.

물론 동시에, 그래도 굳이 확인하고 싶은 심리도 분명히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그래도 두 가지 모두를 접하게 된다면 먼저 접한 쪽이 실망스러운 경우가 만족스러운 경우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나중이 만족스러운 편이 그래도 낫다는 것이지요.

〈츠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의 경우 저는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실망이 나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설이 영화보다 더 만족스러웠다는 것이지요.

물론 전적으로 이는 저만의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얼마든지 있을 터이니까요.

어쩌면 원작자가 워낙 발군의 소설가인 아사다 지로라서일까요?

이런 경우에는 영화가 소설과 맞서서 아무래도 손해를 보기가 더 쉽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죽음의 공포를 위한 실용서

소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은 시종일관 흥미진진합니다.

뿐더러, 무엇보다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견딜 수 있는 정서적인 힘을 준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감히 표현한다면, 이 소설은 그야말로 매우 ‘실용적’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웬만한 실용서들보다 훨씬 나은 셈이라고 해도 지나친 평가가 아닐 것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기발한 상상력, 구체적인 삶의 차원을 꿰뚫어 보는 유별난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는 작가 자신의 따뜻한 시선―.

그 모든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소설이 바로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입니다.


실망할 각오, 불만의 예감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지금까지 꽤 읽었지만, 적어도 실망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또한 상당히 잘 읽히는 소설이었지요. 거의 단숨에 읽었으니까요.

아마도 그 감흥이 사뭇 짙었나 봅니다.

감흥이 짙은 만큼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츠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이 몹시 궁금했고, 그래서 실망할 각오를 하고서라도 끝내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은 궁금증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확인하기가 잘못이었지요. 항상 이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우면 만족스러운 대로, 불만스러우면 불만스러운 대로 꼭 ‘확인’을 해보고 싶으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행복한 고민

아마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접했더라면 그런대로 흥미롭게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그 자체로 별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약점이기도 합니다. 별 무리가 없는 만큼 다소 심드렁하게 느껴지니까요.

이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인 더 풀》(이유원 옮김, 은행나무)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인 더 풀〉(2005, 미키 사토시)이 실망스러웠던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 실망은 소설의 감흥이 짙은 꼭 그만큼의 실망이지요. 참 운명적인 반비례 관계인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은 소설로만, 영화는 영화로만 보려는 노력을 앞으로도 하게는 되겠지만, 썩 수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영화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감수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하고 많은 세상 고민에 대면 이 정도야 썩 행복한 고민 아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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