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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4. 어린이의 웃음을 지켜라

- 피트 닥터, 〈몬스터 주식회사〉

by 김정수

C64. 어린이의 웃음을 지켜라 - 피트 닥터, 〈몬스터 주식회사〉(2001)

두 개의 웃음

영화 속 웃음이라면 저한테는 두 가지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하나는 〈첩혈쌍웅〉(1989, 오우삼)에서 시체들이 참혹하게 널린 킬러 주윤발의 거처에 당도한 형사 이수현이 주윤발과 자신을 장차 ‘첩혈(喋血)’의 우정을 나눌 ‘쌍웅(雙雄)’으로서 동일시하는 운명적인 순간 그가 지어 보인 백만 불짜리 웃음입니다.

또 하나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세르지오 레오네)에서 자신의 밀고로 뜻하지 않게 친구 셋을 죽음으로 내몬 자책감을 견디다 못한 로버트 드 니로가 차이나타운의 한 음침한 매음굴에서 아편에 절은 몸으로 드러누워 천장의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혼몽한 상태로 입가에 그려 보이던 그 슬프디 슬픈 마지막 웃음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경우 모두 감독은 그 순간 그 웃음의 강렬한 이미지를 관객한테 각인시키고자 절묘한 타이밍으로 화면을 정지시킵니다.

물론 그 두 영화에서의 웃음은 엄밀히 그 개념을 규정하여 일컫자면 ‘미소’가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두 가지 소리 없는 웃음이 저한테는 그 어떤 강렬한 감정 표출로서의 웃음보다도 더욱 깊고 선연한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웃음이 어울리는 자리

하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영화 속의 어떠한 이미지도 그것이 전체 이야기의 일부분으로서 그 본디 소임을 다해야만 제 존재가치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보기로 든 두 개의 웃음이 그토록 돌올한 이미지로 제 뇌리에 각인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그만큼 영화 속에서 그것이 이야기의 앞뒤 맥락과 잘 어울리는 자리에 놓여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이미지 하나만을 독불장군식으로 돌출시켜 그 어떤 정서적 공감의 불길을 관객의 가슴속에 충분히 지펴놓기란 아무래도 어려운 일 아닐까요.

〈첩혈쌍웅〉이 예의 미소에 앞서 주윤발과 이수현의 존재감과 동질성을 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을 만큼 대등한 비중으로 미리부터 부각해 놓은 것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로버트 드 니로의 절망적인 상황을 오랜 시간에 걸쳐 남김없이 보여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미소 짓게 만든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 두 웃음의 이미지를 각각의 영화 속 바로 그 자리, 그 순간에 마주칠 때마다 저는 전후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별수 없이 그 찰나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고야 맙니다.


예수님의 웃음

위에서 보기로 든 두 웃음에서 제가 느낀 것은 어쩌면 미학적인 감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굳이 ‘이미지’라는 말을 쓴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데, 제게는 그와는 성격이 사뭇 다른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웃음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샘터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헤세를 위시하여 뵐, 브레히트, 사로얀과 같은 세계적인 문호들의 짧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작은 책자를 성탄절을 기념하여 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주님 곁으로》였고, 표지에는 ‘The Laughing Christ’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의 상반신 인물화가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영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것은 예수님의 웃는 모습을 그린 데생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웃음은 소리 없는 미소 따위가 아니라, 온 얼굴의 근육을 남김없이 일그러뜨리는, 문자 그대로 파안대소(破顔大笑)였지요.

거기에서 저는, 애써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예수님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실제로 제 고막을 두드려대는 듯한 감흥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충격이었지요.

예수님의 웃는 얼굴을 저는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현실 속에서 접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이미지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피를 흘리다가 끝내 절명 상태에 빠진 한 가련하고 연약한 청년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창백한 안색, 고뇌에 젖은 눈빛, 야윈 몸매, 골고다로 가는 길에 자신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한테 떠넘길 수밖에 없었을 만큼 쇠진한 기력…….

하지만 그 소책자 표지의 예수님은 그런 이미지들을 일거에 무색하도록 할 만큼 생명력이 넘치는 활기찬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단순히 감동케 한 것만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돌덩이로 내리치듯 충격했습니다.

그때부터 다음과 같은 의문이 늘 저를 따라다녔지요.

‘왜 예수님의 웃음을 나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을까?’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도 그 뒤에 알았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단 한 번도 웃으신 적이 없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한 예수님도 어느 순간에는 분명히 웃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웃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예수님의 영적 권세와 권위를 강조하려는 신약성경 필자들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해문서(死海文書)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삶을 그린 〈가든 오브 에덴〉(1998, 알렉산드로 달라트리)은 그 마지막 장면을 통하여 예수님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 인상적인 영화였지요.

예수님의 웃음을 발견한 것은 제게 분명 충격이자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웃음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아서, 때로는 사람을 추하고 천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또는 행복감의 표현인 웃음의 중요성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웃음의 아름다운 이미지 하나를 우리는 〈몬스터 주식회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비명이 에너지원?!

여기, 괴물들의 세상이 있고, 인간의 세상이 있습니다.

한데, 이 괴물들의 세상이 인간 어린이들의 비명을 에너지원으로 삼고 있다는 설정이 재미있습니다.

괴물들은 밤마다 인간 어린이들의 방에 있는 벽장문을 열고 나타나 자는 어린이를 깨워 겁을 주고, 그 순간 놀란 어린이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 그 소리를 저장해 돌아가 자기들 세계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괴물들의 세상은 바로 그 에너지로 돌아가고, 유지되는 시스템인 것이지요.

문제는 괴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어린이들이 늘어나는 최근의 사태였습니다. 괴물들 처지에서는 에너지난이 심각히 우려되는 상황이었지요.

이에 에너지 조달을 담당하는 몬스터 주식회사의 회장은 충복을 시켜 비밀리에 어린이한테서 강제로 비명을 짜내는 기계를 고안토록 합니다. 어린이 납치도 불사하겠다는 극약처방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은 이 판국에 우연히 어린 인간 소녀 ‘부’가 몬스터 세계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새로운 에너지정책

몬스터 주식회사 직원으로서 비명 채집의 일인자로 인정받는 ‘설리’라는 거구의 괴물이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이 귀여운 소녀 ‘부’와 우연히 접촉하면서 이야기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비명의 열 배나 되는 강력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둘은 속절없이 담뿍 정이 들고 맙니다.

우여곡절 끝에 몬스터 주식회사 회장의 무서운 음모는 마땅히 실패하고, ‘설리’는 ‘부’를 다시 제 방으로 돌려보내며, 세상은, 괴물의 세상이나 인간 세상이나, 모두 다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비결입니다.

밤마다 울려 퍼지는 어린이들의 웃음소리―.

어디에나 언제나 어린이의 웃음만이 가득해야 하고, 이 웃음을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이 괴물 세계의 새로운 에너지정책이 되어 있는 형국―.

이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어린이가 웃어야 한다는 것―.


어린이의 웃음이 있는 세상을 위하여

하지만 영화가 이대로 끝난다면 조금은 싱겁겠지요. 한 장면이 남았습니다. 실은 이 한 장면을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로 ‘설리’가 괴물 세계의 규칙대로 폐기 처분한 ‘부’의 벽장문을 친구의 도움으로 되살려내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부’와 감격의 재회를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로지 화면에 보이는 것은 몬스터 ‘설리’의 얼굴뿐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에 하나 가득 눈부시게 번져 나오는 웃음―.

이 영화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웃음은 인간 어린이의 웃음이 아니라 괴물의 웃음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과 기쁨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 끔찍한(!) 웃음의 이미지에 그 누가 매혹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요.

지난 세기 전쟁의 암울함 속에서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어린 소녀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에 없는 것이 바로 이 웃음 아닙니까. 그래서 그것은 온전히 불행한 시절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는 어린 영혼이 그런 일기를 쓰는 세상이 와서는 안 되겠지요.

어린이의 웃음은 이 세상 행복의 바로미터입니다. 어린이가 반드시 선하고 순수하기만 한 존재라고 ‘순진하게’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기꺼이 그렇다고 믿고 싶을 만큼 한없이 선해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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