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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9. 선택을 강요받은 이의 비극

- 윤종찬, 〈청연〉

by 김정수

C69. 선택을 강요받은 이의 비극 - 윤종찬, 〈청연〉(2005)

강요받은 선택의 비극

누군가 선택을 강요받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는 사태일 것입니다. 이런 계열로 저는 늘 가장 먼저 〈소피의 선택〉(1982, 알란 J. 파큘라)을 꼽습니다. 강요받은 선택으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어야만 했던 여인 메릴 스트립의 그 슬프디 슬픈 눈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청연〉 또한 선택을 강요받은 자의 비극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사무치게 슬픈 비극이지요. 왜냐하면, 그 선택은 그 선택 자체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투표하지 않고 기권할 자유가 없는 선거란 얼마나 끔찍합니까. 기권 자체도 당당한 하나의 의사표시임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겠지요.

선택이라는 행위가 의미를 얻는 것은 그 선택 자체를 거부할 자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일 것입니다. 이 명제를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죽고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근현대사가 선택 자체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고약한 선택의 강요로 얼룩진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 아닙니까.


자기 배반의 딜레마

하지만 설사 그 선택의 결과가 때로는 순교요, 때로는 투옥이요, 때로는 추방이요, 때로는 테러요, 때로는 왕따라 할지라도 그것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한쪽을 자기 뜻대로 의연히 선택한 결과라면 대놓고 그것을 비극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부정하면 살려 주겠노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당당히 죽음을 택한 순교자를 어찌 비극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으며, 부패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투옥된 지사를 누가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선택의 상황이 비극이 되는 것은 선택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또는 선택하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할 때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자기 배반이 됩니다.

최인훈의 《광장》은 바로 그런 자기 배반의 딜레마가 야기하는 비극의 한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남도 북도 선택할 수 없었던 석방 포로 이명준은 결국 제3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고 맙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정직한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 선택하는 죽음은 어쩌면 그런 딜레마의 상황을 빚어낸 시대 전체를 향한 처절한 항변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선택지

이 영화 〈청연〉에서 ‘조선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 박경원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영화를 둘러싼 친일 논란이 암시하고 있듯, 어쩌면 정답은 자명할 수도 있습니다.

박경원은 복거일이 그의 데뷔작인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 지극히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였던 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끝내 도달할 수밖에 없는 피식민지인의 비극적인 운명과 고스란히 맞닥뜨렸기 때문입니다.

《비명을 찾아서》의 마지막 대목에서 일본명 기노시다 히데요인 주인공 박영세는 스스로를 ‘내가 나일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망명객’으로 규정하고, ‘먼 대륙’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러니, 영화 속 대사로도 말해지듯, 박경원도 안창남처럼 일장기가 그려진 비행기를 몰고 날아가 독립군의 품에 안겼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경원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박영세가 아니라, 이명준에 더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그렇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점에서 영화 속의 박경원이 우리네 보통 사람과 가까운 현실적인 인물인 이유는 《광장》이 《비명을 찾아서》보다 더 우화적인 소설인데도 정작 그 주인공인 이명준이 박영세보다 더 현실적인 인물인 이유와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영화 속 인물 박경원은 강요된 선택의 정황에서 그 어느 쪽도 아닌 죽음을 택합니다.

이 죽음에 공감이 가는 것은 그 순간 박경원의 모습으로부터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이 벌어진 노량에서 적의 유탄에 맞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전투를 지휘한 이순신 장군의 심정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꿈과 민족 사이의 선택

요컨대, 감독은 영화에서 박경원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자의 고통스러운 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범주를 좁히면, 그것은 꿈과 민족 사이의 선택일 것입니다.

여기서 박경원이 조선인임을 근거로 민족을 선택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영화를 만들 필요도 없겠지요.

관객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작자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꿈을 따르자니 민족을 배반해야 하고, 민족을 따르자니 꿈을 포기해야 하는 이 애처로운 한 젊은 여인의 심경이 핵심입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서슴없이 민족을 따르기에는 비행기 조종사로서 창공을 가르는 삶을 살고 싶다는 박경원의 꿈이 너무나 큽니다.

그것은 고향 마을에 점령군으로 진주해 오던 일본군의 행진을 보고 즐겁게 닌자를 떠올리던 어린 시절부터 한 소녀가 오래도록 간직해 온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깊고 진한 꿈이기에 소녀는 그 꿈을 이루고자 곁눈질 한번 없이 줄기차게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피식민지인의 가혹한 운명은 어김없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그녀는 선택을 거부합니다.


두 가지 해석의 태도

이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의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꿈을 선택하든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든, 결국 민족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니, 그 자체를 민족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하는 태도입니다.

또 하나는, 직접적으로 민족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큰 꿈 또한 죽음으로써 선택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니, 최소한 그녀가 민족을 배반하는 길을 걷지는 않은 셈이라고 헤아리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제 마음이 후자 쪽으로 향하는 것은 대책 없는 온정주의에서가 아니라, 사랑도 꿈도 끝내는 잃을 수밖에 없는 피식민지인의 그 비극적 운명에 가슴이 너무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

(〈청연〉은 뒷날 일정한 시차를 두고 차례로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난 두 ‘젊었던’ 배우, 장진영과 김주혁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본다면, 적어도 그 본다는 행위가 지닌 의미의 절반은 곱절로 가슴이 아프고, 곱절로 그리운 추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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