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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21. 2024

5. 고왈, 유인인, 위능애인, 능오인……

  - 〈애오잠병서〉 /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대처하는 자세

   한시를 포함한 옛글의 여러 가지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글 속에서 다양한 인용을 한다는 점입니다. 고사(故事)는 물론이고, 경서(經書)의 구절들이나 시구(詩句) 따위를 그 각각의 출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은 채 종횡무진으로 인용하지요.

   그래서 옛글의 경우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런 다양한 출처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애오잠병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달충은 무시옹의 입을 빌려 《논어》 〈里仁篇(이인편)〉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씀 한마디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시작합니다. 물론 이 인용문이 공자의 말씀이라고 밝히지는 않은 채로요.

   故曰(고왈), 惟仁人(유인인), 爲能愛人(위능애인), 能惡人(능오인).

   끊어 읽기는 ‘유/인인, 위/능애인, 능오인’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형용사인 ‘악할 악(惡)’자는 동사로 ‘미워하다, 싫어하다’라는 뜻일 때는 ‘오’로 읽는 글자지요? 앞의 ‘能愛人(능애인)’에서 ‘愛(애)’자가 동사로 쓰였으니까 그 호응 관계를 고려할 때 이 글자도 동사로 ‘미워하다, 싫어하다’라는 뜻으로 보아 ‘오’로 읽고, 그런 뜻으로 새기는 것입니다.

   또, 바로 앞에 붙은 ‘能(능)’자 자체가 ‘~할 수 있다’라는 뜻의 조동사니까 당연히 이것은 형용사인 ‘惡(악)’이 아니라 동사인 ‘惡(오)’라야 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문장을 보면, 맨 앞의 故曰(고왈)은 보통 ‘그러므로 말하(이르)기를 ~라고 하였다’ 정도로 많이들 번역하는 말이니, 바로 그다음이 인용문에 해당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이 경우 ‘그러므로 말하였다’라고 일단 끊고, 다음의 인용문을 큰 따옴표(“”)로 처리하는 식의 번역을 선호하는 편이기는 합니다.

   이 ‘曰(왈)’자에 대해서는 제가 배웠던 교수님들도 각기 선호하시는 바가 달라서 꼭 ‘말하(이르)기를 ~라고 하였다’라는 식으로 처리하기를 고집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을 미워할 수 있다.”

   당연히 曰(왈)의 생략된 주체는 공자입니다.

   이렇게 숨은 주어를 공자로 특정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논어》 〈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공자님의 말씀을 살짝 손질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惟仁者(유인자), 能好人(능호인), 能惡人(능오인).

   구법(句法)이 비슷하지요? ‘구법’이란 ‘시문(詩文)의 구절을 지어 나열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남을 미워할 수 있다.

   두 문장을 서로 견주어 보면, ‘者(자)’자가 ‘人(인)’자로 바뀌었고, ‘能好人(능호인)’ 앞에 ‘爲(위)’자가 새로 붙었으며, ‘能好人(능호인)’의 ‘好(호)’자가 ‘愛(애)’자로 바뀐 것 말고 나머지는 다 그대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진 느낌이기는 하지만, 뜻의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能好人(능호인)’ 앞에 붙은 ‘爲(위)’자는 ‘하다’라고 새겨지기도 하는 글자이니, ‘좋아할 수 있다’라는 뜻의 ‘能好(능호)’라는 말을 동사로 조금 더 강조하는 정도의 구실을 한다고 보면 무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문장은 워낙 유명해서 글을 좀 읽을 줄 안다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전통적인 인용의 관습과는 무관하게, 굳이 주어인 공자를 밝혀서 쓰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합니다.

   물론, 〈애오잠병서〉의 이 문장은 그 정확한 모양이 《大學(대학)》의 〈傳十章(전십장)〉에 그대로 나옵니다. 한데, 《대학》 자체가 공자님의 말씀을 기록한 글이니까, 그 인용의 본디 출처는 《논어》의 공자님 말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시옹이 이렇게 느닷없이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무리를 시작한 것은 당연히 자기 주장을 공자님의 권위로 뒷받침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곧, 공자님도 어떤 불순한 사심 없이 사람을 순수하고 공명정대하게 좋아하거나 미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에 대해서 칭찬을 하든, 비난을 하든, 그 칭찬과 비난이 내가 충분히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칭찬이나 비난이려면 그 칭찬과 비난의 주체가 ‘인자(仁者)’, 곧 ‘어진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이 ‘인자’를 무시옹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바로 앞서의 ‘기인(其人)’, 곧 ‘좋은 사람’이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무시옹은,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어진 사람, 또는 좋은 사람이 하는 칭찬이나 비난이 아니라면 그런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들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무시옹은 마지막으로 유비자에게 이렇게 되묻습니다.

   其人吾之人(기인오지인), 仁人乎(인인호)? 不人吾之人(불인오지인), 仁人乎(인인호)?

   번역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나를 사람답다고 한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가? 나를 사람답지 않다고 한 사람이 어진 사람인가?

   끊어 읽기는 ‘기/인오지/인, 인인호? 불인오지/인, 인인호?’ 정도로 하면 되겠네요.

   무시옹은 여기까지 자기 주장을 다 펼쳐놓은 다음,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해온 유비자를 상대로 그런 평가의 말들을 한 사람이 어떤 됨됨이의 사람인지를 마침내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람이 과연 어진 사람이냐, 이것이지요.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이라면, 나는 그 평가들을 받아들여 기뻐할 수도, 걱정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런 평가들에 마음 쓰지 않겠다는 자기 생각, 자기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오잠병서〉에서 유비자와 무시옹 사이의 문답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이 글의 작자인 이달충이 자기 목소리로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 첫 문장부터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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