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77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77

by 김정수

CA381. 알렉스 가랜드, 〈시빌 워: 분열의 시대〉(2024)

이 제목은 결국 ‘내전’이고, 부제인 ‘분열’도 결국 ‘내전’을 가리킨다. 내전의 결과는 국민, 또는 시민의 희생이다. 모든 전쟁 가운데 가장 사악하고 잔혹하고 몰인정하고 한심한 전쟁이 바로 내전 아닌가. 왜냐하면, 국가 간의 전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질문, 곧 “너는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한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또는, 대답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다. 그런데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이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일찍이 이청준 선생이 중편소설 《소문의 벽》에서 ‘진술공포증’이라는 이름으로 갈파한 것이 바로 이 딜레마의 비극성 아니었던가. 이런 딜레마가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세상을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진짜 비극이요 공포다.


CA382. 크리스틴 제프스, 〈선샤인 클리닝〉(2008)

그저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가장 끔찍한 죽음의 현장을 말끔히 처리하고 정돈하는 일. 어디서인가부터 잘못되어온 삶에 대한 청소. 죽음의 현장은 청소할 수 있지만, 삶도 그처럼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때까지의 삶을 부정하거나 걷어내고 새로운 삶을 다시금 시작할 수 있을까. 누구나 욕망하지만 아무도 그리할 수는 없는 새로운 출발. 어째서 삶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어째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까. 그토록 어렵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그토록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누구나 그것을 바라는 것일까. 어쩌면 삶은 지나간 것을 부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정하지 않으면 새로이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자살한 엄마, 엉뚱한 아버지, 기묘한 아들, 한심한 동생, 그리고 자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남자한테 매달리는 딱한 나 자신. 에이미 아담스의 눈빛에서 늘 수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퍽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수심이 그 내면의 생명력을 짓누르기에는 역부족인 것도 사실이다. 엄마의 모습을 옛날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한사코 확인하려는 이 두 딸의 그리움이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는 것은 수심 때문이 아니라 생명력 때문이다. 아무렴. 클리닝이되 ‘선샤인’ 클리닝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또, 죽은 사람의 피범벅과 눈부신 햇빛의 어울리지 않는 얽힘이 뜻있는 까닭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어쩌면 클리닝이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CA383. 미이케 다카시, 〈크로우즈 제로〉(2007)

오로지 건물만으로 존재하는 학교. 따라서 그 학교는 이미 학교가 아니다. 학교가 학교가 아니니, 학생이 학생일 까닭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선생과 규제, 또는 통제가 깡그리 사라진 일종의 해방공간. 무법천지. 그런 곳에서는 결국 힘이, 그리고 그 힘의 서열만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줄기차게 싸운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엔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싸움이되 서열 말고는 아무것도 목표로 삼지 않는, 요컨대 바라지 않는 싸움이다. 일종의 ‘순수한’ 싸움. 순수한 싸움이기에 오구리 슌의 매력이 상처받지 않고 고이 보존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이 이 순수한 싸움에 지나치게 깊이 개입하지 않도록 설정한 것은 이 싸움의 순수함을 이 영화의 강점으로 삼으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닌지. 그래서 이 싸움은 진흙탕의 개싸움이면서도 고약하지가 않다. 아마 이 영화에서 미이케 다카시를 칭찬할 만한 요소를 찾으라면 바로 이것이 아닐지. 물론 이 칭찬도 미이케 다카시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지만. 그리고 타격의 음향효과, 그 싱싱한 청각적 쾌감.


CA384. 닐 블롬캠프, 〈디스트릭트 9〉(2009)

대화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또는, 탐욕이 대화와 소통을 끊고 파국을 맞게 하는 원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파국도 마다하지 않는 보유 기술력에 대한 오만, 또는 착각, 또는 오판? 외계인과 인류의 또 한 가지 고약한 만남의 사례. 20년. 그것은 무엇을 위한 기다림이었을까. 어째서 확실한 30년이 아니라, 어정쩡한 20년일까. 외계인의 모선이 허공에 떠 있는 그 20년 동안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외계인에 대한 ‘관리’뿐이다. 그것은 명백히 공존이나 교류가 아니라 관리다. 달리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관리하는 쪽과 관리를 당하는 쪽, 이 양자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란 있을 수 없는 일 아닐까. 그들은 일종의 포로다. 인간과 외계인의 DNA가 한 몸에서 뒤섞이는 과정이 어째서 악몽이어야 하는 걸까. 가장 즉물적인 상태의 교류, 그 상징으로 볼 수는 없을까. 몸과 몸이 뒤섞이면서 비로소 인간은 외계인을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로 여기기 시작한다는 것. 아니, 그 출발이 비로소 감행된다는 것.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한 끝에! 이것을 실낱같은 희망으로 새길 수도 있을까. 쓰레기로 만든 꽃 한 송이의 희망? 한데, 왜 하필 요하네스버그일까. 요하네스버그는 정말 뉴욕과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지구의 변방일까. 또는, 변방일 뿐인 것일까. 아니, 그곳을 변방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곳이 변방이라면 그곳을 변방으로 규정한 것은 누구이며, 그 기준은 무엇일까. 어째서 하필이면 그곳을 선택했을까. 색깔 때문일까? 난민촌의 분위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정치적인 선택이 아니라, 아주 미학적인 선택이다. 기술적으로는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 등치시키기 위한 조치. 아, 그리고 물론 피터 잭슨!


CA385. 신정원, 〈차우〉(2009)

어째서 살쾡이나 늑대나 곰이나 호랑이가 아니고 멧돼지일까. 비탈을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르고. 여기까지라면 웃기지 않지만, 기어코 한 번 더 구르면 비로소 웃음이 터진다. 그러니 이것은 타이밍이다. 아니, 인내력이다. 고집이다. “위증하면 구속인 거 알아요?” “몰라요.” 이상한 순간에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 이상한 대사가 빚어내는 웃음. 어설픈 시골 순경들. ‘어설픈’과 ‘시골’의 조합. 마땅히 그럴 법한.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도. 멧돼지 뱃속에 들어 있는 커피믹스. “커피까지 드셨구만.”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체 게비라와 박정희. 먹고 먹히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이것이 인간사라는 있을 법한 통찰, 또는 있을 법한 수준의 인식. “제인 구달이라고 아세요?” “비달 사순?” 사람들을 뒤쫓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멧돼지. 〈괴물〉(2006, 봉준호)의 잔상.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 들어봤어?” 포수(砲手) 선후배 사이인 장항선과 윤제문의 배역 이름, 각기 천일만과 백만배. 주말농장과 멧돼지. 경찰과 이장, 또는 이장님. 이 경우 왜 항상 이장인가. 봉준호의 〈괴물〉에는 괴물의 새끼 이야기가 없다. 곧, 어미와 새끼, 아비와 새끼 사이의 교감에 대한 사려 깊은 할애가 없다. 이 차이가 예사롭지 않다. 똑같은 괴물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괴물과 괴물 멧돼지는 역시 다르다. 한데, 제목을 왜 ‘차우’로 붙였을까. Chaw. 씹다. 멧돼지와 씹기. 씹기의 감촉. 징그럽고 질긴 그 특유의 즉물적인 느낌. 잔인함. 끔찍함. 또는 냉소의 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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