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78
CA386. 김소영, 〈나무 없는 산〉(2008)
삶은 위태롭다. 한없이 위태롭다. 너무나 위태로워서 때로 우리는 그 위태로움을 잊는다. 하지만 그 위태로움이 까닭 모르게 문득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 아이들은 할머니의 구멍 난 신발을 보고 마침내 그 위태로움을 깨닫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엄마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푼 두 푼 동전을 채워 넣은 돼지저금통을 새 신발을 사 신으라며 기꺼이 할머니한테 건넬 때, 그 장면을 희망으로 읽어야 할 당위가 있을까. 그 순간 아이들은 구멍 난 신발을 신고 있는 할머니에게 측은함을 느꼈다기보다는, 또는 할머니의 구멍 난 신발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 신발만 사 신을 생각을 한 철없음을 자책했다기보다는, 바로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깨달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이들은 할머니의 구멍 난 신발에서 비로소 삶의 위태로운 실상을 엿본 것이 아닐까. 삶이 위태롭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철이 드는 순간임을 이 영화는 너무나 아프게 보여준다. 이 위태로움에 대한 자각으로 아마 그 아이들은 엄마 없는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그 아이들의 마지막 천진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한없이 위태롭게 떨린다.
CA387. 이황림, 〈깜보〉(1986)
리메이크할 만한 예전 한국영화를 고르라면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장두이와 박중훈은 서로 어딘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리는 파트너. 이 기묘한 어울림 또는 어울리지 않음의 매력이 이 영화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골탕 먹이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며 어딘가에 도달하고야 마는 이야기. 하지만 장두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박중훈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장두이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배신과 충격과 절망 또는 분노. 어쩌면 안심? 아마 장두이는 그곳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에서 이미 그 결말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것은 사후 확인인 셈이다. 발길을 돌리고 미친 듯이 뛰어가 그곳을 벗어나는 장두이가 그 순간 그저 좌절하고 있다고만 새겨 읽을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그는 자기 아내와 딸이 자기가 없는 동안 무사히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고래사냥〉(1984, 배창호)의 결말과 〈깜보〉의 결말은 이 지점에서 서로 충돌한다. 그러니까 〈깜보〉가 그보다 2년 먼저 만들어진 〈고래사냥〉의 결말을 조금 비껴간 셈이다. 이 결말도 낯익은 것이기는 하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또 하나의 결말이다. 가슴이 아파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말. 여기서 조금 더 비장해지지 않은 것을 꼭 단점으로 새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
CA388. 지아장커, 〈동〉(2006)
네 개의 ‘갑자기’―. 몸이 대상에 대한 묘사를 방해한다면 내 몸이 움직이는 대로 놔두어야 한다. 몸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화가의 마음가짐. 몸이 자라는 것, 또는 육체의 성장에 관심이 많은 화가. 나이가 들어 몸이 자기 뜻을 안 따라주는 것과, 뜻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몸과 재능. 몸과 솜씨. 몸의 단련과 재능의 연마. 그는 화가지만, 그의 고민은 그림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중국 노동자들이 입고 있는 팬티는 왜 전부 파란색 또는 푸른색일까. 아니, 이건 팬티가 아니라 ‘빤쓰’다. 성장하는 육체와 무너지는 건물. 이 기이한 대비. 노동은 육체를 단련시키는가 허물어뜨리는가. 건물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쓰는 육체와, 그렇게 해서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서 죽는 육체. 화가의 찢어진 우산과 디카. 달리는 차에서 조는 화가. 첫 번째 ‘갑자기’. 촬영 도중에 생긴 차량 사고. 촬영을 멈추지 않는 카메라. 줄기차게 내리는 비. 느닷없는 눈물. 또 눈물. 그는 어째서 눈물을 흘린 것일까. 노동자의 죽음, 또는 모델의 죽음. 화가는 죽은 자의 가족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두 번째 ‘갑자기’. 태국 방콕으로 가는 화가. 아니, 이미 방콕에 가 있는 화가. 그리고 여인들. 그는 방콕의 젊은 여인들을 관찰하고 그린다. 거기서 그가 문득 이야기하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 관심이 가기 시작한 옛날 중국의 역사다. 특히 북위시대. 그 시대를 그는 예술의 절정기라고 규정한다. 세 번째 ‘갑자기’. 화가를 버리고 모델 여인을 좇는 카메라. 고향에 홍수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여인. 그 여인의 얼굴에 서린 수심. 예술로 뭔가를 변화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다. 잘 살면 그뿐. 내 생각을 표현하며 살고 싶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화가. 그림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생각이 퍼진다면 역시 그뿐. 그러니 화가의 관심은 그림이 아니다. 네 번째 ‘갑자기’. 시장통에서 노래 부르며 동냥하는 시각장애인 사내 둘. 카메라의 마지막 일별.
CA389. 스테판 루조비츠키, 〈카운터페이터〉(2007)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유태인들은 자유를 얻고 나서 제일 먼저 레코드판을 듣는다. 토셀리의 세레나데. 우리한테는 ‘기쁜 우리 젊은 날’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노래.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에서도 그랬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 선율은 듣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성질은 조금 다르지만, 미어지기는 마찬가지. 위조지폐 주조가 레지스탕스를 돕는 일에도 쓰이지만, 나치의 전쟁 수행을 조력하는 구실도 한다는 것. 일명 베른하르트 작전. 위폐를 만들면 독일군을 돕게 되고, 위폐를 만들지 않으면 동족인 유태인의 목숨이 위태롭다. 크게는 일종의 부역이요 이적행위지만, 작게는 그 일에 강제로 동원된 유태인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작업.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 두 겹의 고통스러운 질문. 하지만 억울하고도 맥없이 나치의 총탄에 쓰러져가는 동족의 죽음 앞에서 이 질문을 던질 겨를 따위는 없다. 고도의 장인스러운 솜씨를 남김없이 발휘해야만 하는 상황. 데이비드 린의 〈콰이강의 다리〉(1957)에서 일본군에 붙잡힌 미군 포로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폐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의 정교한 위폐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 기쁨과 이적행위의 죄책감이 한데 뒤얽혀 있다는 것. 성공의 기쁨과 생존의 안도감이 동시에 죄업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 이 가혹하기 짝이 없는 딜레마. 그가 전쟁이 끝난 뒤 그 어마어마한 위폐들을 하룻밤 도박으로 몽땅 날리는 행위의 저 차라리 자학이라고나 해야 할 가슴 아픈 상징성.
CA390. 윤재연, 〈요가학원〉(2009)
그 여자들은 도대체 자신의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은 것일까. 아니, 바꾸고 싶은 것일까. 정말 요가라는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또는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이 영화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아쉬운 대목이다. 여러 사람이 한 장소, 한 공간에 모여 있다가 하나씩 죽어 나가는 이야기의 이 질긴 상투성. 어째서 따로따로 죽이지 않고 한군데 모아놓고 죽이는 것일까. 죽음, 또는 환각, 또는 도태, 또는 퇴출. 그래야만 하는 서사의 필연성에 대한 피해지지 않는 의문. 차크라와 쿤달리니. 열어야 한다. 그래야 뜻하는 바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요컨대 변할 수 있다. 왜 변해야만 하는가. 왜 아무도 이것을 묻지 않을까. 동시녹음과 목소리. 배우의 몰락. 유성영화의 등장과 목소리가 거친 여배우의 몰락. 수련 중에는 거울을 보지 말아야 하고, 수련이 끝난 뒤에는 한 시간 동안 샤워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몸의 단련과 마음의 치료. 쿤달리니는 왜 한 사람밖에 열 수 없는가. 경쟁. 집착. 질시. 도태. 신선, 짐승, 귀신. 아침, 저녁, 밤. 영혼을 덜어내야 쿤달리니를 열 수 있다. 30년 전의 젊음을 되찾는 프로젝트. 그 희생자들. 그토록 ‘예쁜’ 그 여자들이 더 예뻐지려고 요가학원을 찾는다는 설정에 대한 마땅한 의문. 그들은 하나도 예뻐지지 않았다. 또는 조금도 더 예뻐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요가학원에서 얻은 것은 미모가 아니다. 이 말이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