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0
CA396. 이용주, 〈불신지옥〉(2009)
기도. 이것을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로 볼 것이냐, 아니면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의 표출, 또는 강요로 볼 것이냐. 미친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 신들린 사람들. 비정상. 믿음의 굳건함. 어째서 굳건한 것일까, 삶은 이토록 위태로운데? 다치고, 실종되고, 죽고, 미쳐들 가는데? 자살과 죽음의 차이. 목매달기와 음독, 그리고 은둔 또는 자기 유폐. ‘예수천당’이 삭제된 ‘불신지옥’의 세계. 신이 들리는 것과 신이 내리는 것. 신들림과 신내림. 기독교와 무속의 대결 또는 충돌. 김동리의 단편소설 〈무녀도〉 또는 장편소설 《을화》의 잔상. 이것이 한국 사회의 진상(眞相)인가. 죽음의 예언. 예언의 적중. 허기와 폭식. 화상과 치유 또는 치료. 무엇이 한국 사람들의 정신을, 진짜로, 지배하고 있는가. 한국 사람들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어째서 무당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걸까. 기독교와 무속의 경계, 불교와 무속의 경계. 두 개의 맞닿음과 뒤섞임. 천국과 지옥, 그 양자택일의 갈림길. 지옥과 구원. 믿음과 아집은 어떻게 다른가. 독선과 배타, 그리고 믿음의 강요. 기적 또는 이적과 심판, 그리고 종말.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의 차이. 믿어지는 것과 믿어지지 않는 것의 다름. 내다볼 수 있는 창과 들여다볼 수 있는 창. 88만 원의 생계. 죽거나 사라진 남자들과 남아 있는 딱한 여자들. 그들의 한없는 위태로움. 작두와 부적, 그리고 닭 모가지와 피. 헛것과 이상한 꿈. 신들림과 성령 강림의 차이. 마침내 해석의 문제.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것과,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의 차이. 귀신의 시점 쇼트. 왜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기면, 또는 무슨 일과 맞닥뜨리면 우선 잘못했다고 빌고 보는 걸까. 속죄와 자학의 관계. 믿음과 욕망의 관계. 결국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또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한국사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자식을 살리려는 강렬하고 무지막지한 모성이라는 선언. 이 선언의 끔찍함과 도저함. 이 선언이 드러내 보이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빛깔.
CA397. 제제 다카히사, 〈블레임 : 인류멸망 2011〉(2009)
감염 열도. 감염이 된다는 것은 곧 모두가 운명공동체라는 뜻이다.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한, 더운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한. 나아가 같은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는 한. 그러니, 나와 타자의 구분이란 얼마나 깊은 착각인가. 나와 타자를 구분하려는 욕망과 그 모든 시도가 결국 만악의 근원이요, 불행의 기초라는 인식. 감염, 유전보다 빠른 전달 또는 전파. 몸의 감염과 정신의 감염, 그 차이. 따지고 보면 영화의 흥행도 결국 감염의 결과가 아닐까. 인류 전체가 감염에 관련되어 있는 셈. 그러니까 감염은 삶의 한 메커니즘이다. 살려는 노력이 곧 죽으려는 노력이 되는 모순. 뫼비우스의 띠. 인간이나 바이러스나 자신이 살아가야 할 터전을 망침으로써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하등 다를 게 없다는 것. 터전과 숙주. 그렇다면 공존이 해법일까?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 쓰마부키 사토시와 후지 타츠야. 감염되는 것과 감염시키는 것의 차이. 인식도 감염이요, 학습도 감염이니, 결국은 모든 것이 감염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결국 감염시키는 것과 감염되는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 겉에서 속으로 들어오는 감염과, 속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감염. 더는 죽음을 막을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이 되면 결국 살리는 것보다 외롭지 않게 죽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 또는 처방. 혈청요법의 교훈. 다양한 개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 대개는 죽지만, 누구는 산다는 것. 그러니 인간을 획일적으로 만드는 모든 제도는 종말로 가는 길이라는 자각. 달라야 하고, 다양해야 산다는 것. 그리고 내일 지구가 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낭만적이지만 언제나 유의미한 마음가짐.
CA398. 이연우, 〈거북이 달린다〉(2008)
달릴 수 없는 거북이가 왜 달려야 하는 걸까. 아니, 거북이임에도 불구하고 달려야 하는 걸까.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걸까. 어쩌면 이것이 거북이의 비통한 운명인 걸까. 거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 마침내 달리기로 결심한 거북이의 이야기. 김윤석은 〈추격자〉(2008, 나홍진)에서보다 조금 더 애처롭다. 무능이 그를 그렇게 보이게 만든다. 어째서 똥물에 ‘삶아’ 죽인다고 하지 않고 ‘튀겨’ 죽인다고 말하는 걸까. 어째서 흉악범한테는 항상 순종적인 여자가 있는 것일까. 한국 영화는 한국 경찰을 왜 이렇듯 무능하고 어수룩하게 그리는 걸까. 아니, 왜 그렇게 그리는 것을 즐기는 것일까. 이 또한 현실의 반영일까. 뭔가 본질적으로 부실한 걸까. 조력자와 추종자의 차이. 거북이는 죽자사자 달리는데, 결국 돈가방은 누구의 손아귀에 들어갈까. 토끼는 결국 늑대나 호랑이나 승냥이한테 잡히는 것이 아니라, 거북이한테 잡힌다는 것. 주인공은 왜 항상 몸 어딘가를 다치는 것일까. 〈차이나타운〉(1974, 로만 폴란스키)에서 잭 니콜슨은 코를 찢기더니, 여기서 김윤석은 손가락을 잘린다. 기시감. 돕는 것은 여자지만, 배신을 하는 것도 여자라는 설정. 누군가 돕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고, 누군가 배신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 목표는 범인 체포가 아니다. 한데, 왜 하필 충남 예산일까. 충청도 사투리, 아니면, 그쪽 삶의 어떤 태도가 극의 한 요소로 필요했을까. 탈주범은 정확한 명칭일까. ‘탈주’는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닌 범행일까. 그의 아이들은 왜 이렇게 착한 것일까. 어쨌든 김윤석은 아버지요 가장이다. 그리고 거북이다. 마침내 달리고야 만 거북―. 거북이가 달렸을진대 뜻을 이루지 못할 까닭이 없다는 것. 그것이 아버지로서의,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에 대한 증명이라는 것.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그러니 그는 범인을 체포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아버지다움을, 남편으로서 남편다움을, 가장으로서 가장다움을 회복한 것이다. 이것이 거북이가 끝내 달리고야 만, 달려야만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듯이 거북이는 달릴 수 없다.
CA399. 황수아, 〈우리 집에 왜 왔니〉(2009)
자살에 실패하는 사람과 성공하는 사람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어째서 누구는 실패하고, 누구는 성공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그는 실패했다. 문제는 실패가 실패 그 자체만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 왜?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가 되고, 실패하면 그 당사자의 이야기가 된다. 이 영화는 실패 쪽이다. 그것도 무려 3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이어진 실패의 후일담이다. 이 실패의 당사자인 박희순은 이정철의 〈가족〉(2004) 이후 가장 마음에 든다, 연기도 캐릭터도. 한 입 깨어 물고 싶은 시원하고 달콤한 배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 박희순한테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느낌이지만. 또 하나 문제는 이 실패가 그냥 실패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실패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바로 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 ‘무엇’은 자살에 실패한 당사자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다. 이 나머지를 채워서 이야기를 완전하게 만드는 구실을 하기 위해서 강혜정이 왔다. 이것이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CA400. 민규동,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
무엇을 향해서 가는 이야기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 따위 필요하지 않은 영화일까. 플래시백을 자꾸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이 이야기가 달려가는 목적지가 있다는 뜻일 터인데? 하지만 그 목적지의 정체에 대해서는 자꾸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굳이 그곳을 향해서 갈 필요가 있을까. 또는, 그곳 자체가 필요하기는 한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고개를 든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시각적 쾌감이 그 지향을 자꾸만 방해한다. 이 시각적 쾌감은 일종의 기시감으로, 익숙한 것이기도 하고, 낯선 것이기도 하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이 느낌이 신기하다. 이 익숙함과 낯섦이 마주치면서 빚어내는 어떤 기분 좋은 파열음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달려가는 곳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데도 굳이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상관없지 않은가 싶은 느낌. 약간 마술 같은 느낌. 그래도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있다. 김창완은 유괴범인가 유괴 미수범인가, 유죄인가 무죄인가, 피해자한테서 용서받았는가, 그것을 가리켜 과연 용서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렇듯 넘어가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영화는 이 질문들에 대해서 답하지 않는다. 또는, 답이 뚜렷하지 않다. 답이 뚜렷하지 않은데도 이것을 굳이 단점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어서 신기하다. 아니, 이 신기한 느낌이 신기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