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79
CA391. 하나도우 준지, 〈너를 잊지 않을 거야〉(2007)
그는 어째서 그 순간 ‘그것’과 맞섰을까. 그것도 정면으로. 두 손까지 활짝 펴 내뻗으면서. 아니, 그가 맞선 ‘그것’은 무엇일까. 그 행위는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구하려던 목숨마저도 살리지 못했거늘. 그렇다면 그는 그 순간 그 행위로 무엇을 이룬 것일까. 무엇을 성취한 것일까. 무엇을 보여준 것일까. 어떻게 하려던 것일까. 그는 그 순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폭발해 나왔다. 그럼으로써 무언가가 그 순간 그의 그런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퍼져나갔다. 자꾸, 자꾸. 그 무언가에 대해서 굳이 이름을 붙이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한 번 전해지면 넓고 깊게 퍼져가는 속성을 지닌 그 무엇이다. 이를 우리는 모두 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누구나의 것이기도 하기에. 하지만, 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표현하려는 분명한 욕망과 표현의 거의 분명한 불가능성 사이.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이것은 과연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일까. 그러니 이것은 표현이라기보다는 추모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CA392. 기타노 다케시, 〈감독 만세!〉(2007)
아무리 감독 만세를 외쳐도 감독은 결코 만수무강할 수 없다(정말?). 이것이 문제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기타노 다케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마당인데도 가벼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가벼움을 그가 즐기기까지 하는가는 장담할 수 없다. 가볍게 즐긴다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에. 유머와 슬픔의 관계. 유머 속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는 걸까. 슬픔이 없는 유머는 진짜 유머가 아닌 걸까. 유머가 쌓이고 쌓이면 마침내 슬픔의 빛깔로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그렇다면 유머는 결국 갈데없는 슬픔이기도 한 걸까. 그가 오즈 야스지로를 흉내 낼 때 그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치밀어오르는 우스꽝스러움의 밑바닥에서 시나브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저 가이 없는 슬픔. 이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탓일까, 기타노 다케시의 탓일까. 기타노 다케시가 ‘감독 만세!’를 외치면서까지 맞서 싸우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하여 관객으로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감독의 욕망 또는 소망과 관객의 욕망 또는 소망은 행복하게 일치하기보다는 불행하게 엇갈릴 때가 더 많은 법 아니던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연 떳떳할 수 있을까.
CA393. 필립 노이스, 〈토끼 울타리〉(2002)
이것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발전일까, 변화일까.
CA394. 박진표, 〈내 사랑 내 곁에〉(2009)
실감 나는 연기를 하기 위해 살을 찌우는 것과 살을 빼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분노의 주먹(성난 황소)〉(1980, 마틴 스콜세지)의 로버트 드 니로와 〈내 사랑 내 곁에〉의 김명민, 그 같은 점과 다른 점. 김명민은 어째서 20킬로그램이라는 수치(數値)에 집착한 것일까. 20킬로그램이 빠진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정확히 20킬로그램을 빼는 것과 10킬로그램만 빼고 20킬로그램이 빠진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조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수치에 대한, 또는 그 수치가 대변하는 비주얼에 대한 강박이 연기에 미치는 영향은? 그것을 연기라고 불러도 될까.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배우의 몸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되어 있는 형국의 난감함. 문제는 이 몸 자체의 시각적인 어떠함이 아니다. 이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액션이 문제다. 김명민의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액션이 거의 없다는 것. 김명민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연기가 아니라 몸이다. 그래서 관객은 김명민의 연기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반응한다. 이 둘을 서로 같은 사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이 영화의 새로움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배우의 몸으로 무언가를 말하게 하는 영화. 한데, 이 무언가는 보는 사람을 조금 거북하게 만든다. 몸이냐, 연기냐? 또는 그 둘 다냐? 적어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한국영화는 〈내 사랑 내 곁에〉가 처음 아닐까. 하지만 이 모든 것도 결국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을 때 비로소 드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어쨌거나 가슴이 미어진다. 이것이 박진표 영화의 힘이 아닌지.
CA395. 다카하타 이사오, 〈이웃의 야마다군〉(1999)
하이쿠의 미학이야말로 어쩌면 만화와, 또는 만화가 지향하는 바와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오로지 본질만으로 이루어진 그 무엇. 〈아따맘마〉보다 더 단순한 그림체의 이 기이하리만큼 강렬한 매력.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 이 뜬금없는, 그러면서도 그지없이 잘 어울리는 선곡. 무엇보다도 그 ‘흔한’ ‘아다지에토’가 아니라는 점이 귀하다. 그리고 한 번 듣고 나면 저절로 따라 부르게 되는 가족 합창, 케세라 세라. 무분별한 방임이 아닌 적극적인 렛 잇 비. 이처럼 단순한 그림체의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이 경우 그림체는 곧 세계관이기도 하다. 인위의 억지를 가하려 하지 말고 되는 대로 내버려두면 삶이란 ‘하이쿠’를 닮은, 단순한 것이 되지 않을까. 실은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보증일 텐데, 싶은 생각. 행복하려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이 결국은 인간을 행복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 그런데도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인간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 아니, 못하리라는 것. 그럴 뜻이 인간에게는 애초 없다는 것. 그러니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행복이란 어쩌면 거대한 환영이거나, 거대한 착각인지도 모른다는 것. 어쨌거나 우리네 삶이 〈이웃의 야마다군〉의 그림체와 같은 단순함을 회복한다면 인간은 분명히 행복해지리라는 것. 이 참을 수 없는 유혹. 이런 이웃이 우리 동네에 산다면, 또는 내가 우리 동네사람들한테 이런 이웃이 된다면? 이 애니메이션의 이 ‘단순한’ 미학과 철학, 또는 생활감각이 나는 참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