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2
CA406. 야마모토 야스이치로, 〈명탐정 코난: 칠흑의 추적자〉(2009)
검은 조직과 벌이게 될 최후의 대결. 그에 대한 기대가 명탐정 코난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요컨대 최종목적지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는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다. 한데, 이 코난 시리즈 제13탄의 연쇄살인은 〈10억〉(2009, 조민호)과 비슷하다. 자기 여자―아내든 애인이든 동생이든―를 죽게 한 데 대한 책임을 묻는 방식의 살인. 물론 〈10억〉은 그런 살인을 있게 한, 또는 그런 살인을 방조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으려 했다는 점에서 이 애니메이션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이는 〈10억〉이 〈명탐정 코난: 칠흑의 추적자〉에 견주어 장르적 특성에 아주 충실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장점도 단점도 아니다. 단지 그렇다는 뜻일 뿐. 명탐정 코난 시리즈가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저 해결되지 않는, 또는 고의로 해결해 주지 않는 궁금증은 그것이 풀리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풀리지 않아서 궁금하기도 한 것이다. 어째서 수많은 단서에도 불구하고, 마치 〈슈퍼맨〉에서 아무도 슈퍼맨을 슈퍼맨으로 못 알아보는 것처럼, 아무도 코난을 신이치로 못 알아보는가? 또, 모리 코고로 탐정은 어째서 정신을 잃은 가운데 말을 하는데도 언제나 의심받지 않고 통하는가? 코난 시리즈는 이런 점들에 대한 의문과 이런 점들이 끝까지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자아낸다.
CA407. 위시트 사사나티앙, 〈카르마〉(2006)
우리나라 개봉 제목인 ‘카르마’는 ‘업(業)’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제는 ‘귀신과의 불륜’이다. 한데, 영어 제목은 또 ‘Unseeable(눈에 보이지 않는)’이다. 이 세 가지 제목이 이 영화를 들여다보는 데 유용한 세 가지 필터다.
CA408. 마이크 뉴웰, 〈콜레라 시대의 사랑〉(2007)
콜레라 시대 또는 순수의 시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시대. 그런 사랑이 있었던 시대. 또는, 그때도 여전히 그런 사랑은 어려웠던 시대.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려온 사랑.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절. 사랑이라는 말과 한데 얽힌 콜레라라는 말의 어감은 어째서 이토록 달콤한가? 세상에, 그 끔찍한 전염병의 이름이? 청혼에 “노!”라고 말하면 평생 후회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는 것. 부자와 돈 많은 가난뱅이의 차이는? 연애편지 대필의 이 유구한 역사. 콜레라를 앓는 것과 사랑을 앓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또는 얼마나 다른가? 어느 쪽이 더 오래가는 앓이인가? 수많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그 심리적 에너지의 차이는? 육체의 사랑과 정신의 사랑,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행복이 아니라, 안정일까? 어째서 행복과 안정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오페라를 보면서, 또는 들으면서 눈물짓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에 반응하는 것일까? 51년 만에 찾아온 남자한테 여자는 왜 화부터 낸 것일까? 단지 죽은 남편에 대한 예의 때문에? 설마 51년이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찾아온 남자가 겨우 그 정도 박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돌아가리라고 여자는 믿은 것일까? 천만에! 그러니, 이 장면은 단지 관객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끝까지 유지하기 위한 극적 장치, 또는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한데, 왜 하필 하비에르 바르뎀일까? 아니, 어째서 하비에르 바르뎀의 좀 더 젊은 시절을 다른 배우한테 맡겼을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런 사랑이 이루어진 시대를 어째서 굳이 ‘콜레라 시대’라고 부른 것일까? 또는 규정한 것일까? 이런 사랑은 죽음을 매개로 한 것이기 때문일까? 치명적인 사랑의 가없는 연대기―.
CA409. 홍기선, 〈이태원 살인사건〉(2009)
‘이태원’이라는 말과 ‘살인사건’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은 서로 다르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다. 이 두 개의 감흥이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제3의 어떤 느낌. 이 영화는 바로 그것을 포착해 보여준다. 아니, 규정한다. 또는, 규정하려고 한다. 이태원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왠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까닭은? ‘청소된’ 살해 현장의 황당함. 선샤인 클리닝? 여기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한국 경찰의 어수룩함. 어째서 한국 영화 속 한국 경찰은 꼼꼼하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고, 집요하지도 않을까. 어쩐지 명실상부한 전문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 사건의 앞뒤 정황이 분명하지 않은 이런 사건에서는 어째서 자백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방어흔의 존재. 역추적의 근거. 몰아붙이는 집착과 의지. 방어하려는 잔머리. 중산층 붕괴의 원인은 어쩌면 중산층에 대한 악감정 때문이 아닐까. 위에서든 밑에서든. 위에서는 깔보고, 밑에서는 질시한다. 그 가운데 끼인 괴로움. 따라서 중산층은 견딜 수가 없다. 딛고 올라서거나, 아니면 몰락하거나―. 물론 이 경우 몰락하기가 훨씬 더 쉽고 흔한 일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의식이 험한 직업의 부실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찮다고’ 생각하니 ‘하찮은’ 사람들만 그 일을 하게 되고, ‘하찮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맡게 되면 그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한다. 그러니 ‘하찮은’ 일은 점점 더 ‘하찮게’ 되어간다. 결국 아무도 그 ‘하찮음’을 꾸짖을 수 없다. 누구를 범인으로 확신한 채 진행하는 수사나 재판의 난맥상. 담배꽁초를 그냥 땅바닥에 버리지 않고 털어서 자기 옷 주머니에 집어넣는 검사.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범인이 누구일 수밖에 없다는 추리의 차이. 범인을 잡는 것과 나쁜 놈을 잡는 것의 차이.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무슨 이유가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의 차이. 사람들은 어째서 거기에 더 악하고, 덜 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또, 어째서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살해 동기’를 찾지 못하면 수사는 종결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범행의 전모를 형사의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설명에 대한 이 끈적끈적한 욕망. 범인이 잡힌 것과 수사의 종결은 별개의 문제다. 형사들의 일은 범인이 잡힌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사가 종결되어야 끝나는 것이다. 범인의 체포와 수사의 종결은 서로 다른 사태다. 한데, 이유가, 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그 악행의 악함을 반감시키는 근거가 되는 것일까.
CA410. 심상국, 〈로니를 찾아서〉(2009)
어째서 가난은 자유로움과 뒤섞여 있는가. 기차 지붕에 올라타고 이동하는 것이 공권력의 손으로 규제되지 않는 자유로움. 이 자유로움은 어떤 자유로움인가. 숨 막히는 부유함과 자유로운 가난함. 오른쪽과 왼쪽. 서로 뒤바뀐 거울상. 사고의 전환. 사람들은 어째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이방인을 의심하는 걸까. 김호정은 왜 항상 ‘이런’ 남자의 아내로 나오는 걸까. 그는 로니를 왜 찾아다니는 것일까. 왜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일까. 삶의 고단함을 겪느라 서로서로 독해져만 가는 사람들. 깐죽거리는 외국인. 또는 이주 노동자. 삶의 방편으로서의 태도. 한데, 이주 백수, 이주 불한당은 없는 것일까. 왜 항상 이주 ‘노동자’일까. 일종의 기질로서, 백수나 불한당은 없는 것일까. 그는 어쩐지 노동자라기보다는 백수 같고, 나아가 불한당 같다. 그 편이 더 어울린다. 김현식의 노래 한 곡―‘내 사랑 내 곁에’―때문에 대한민국으로 무작정 날아왔다는 그. 도대체 그의 목적은 무엇일까. ‘있는’ 녀석들이 더한 것일까. 아니면, 더하기 때문에, 또는 더한 덕분에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 맞을까.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어째서 사람은 서로 어울리는 동안 정이 드는 것일까. 아니, 들고야 마는 것일까. 그가 찾는 로니는 정말 로니이기만 한 것일까. 그것은 로니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 아닐까. 그저 로니이기만 하다면 그가 그토록 로니를 찾아 헤맬 필요가 있을까. 어째서 방글라데시일까. 가장 가난하면서 동시에 가장 행복한 나라―. 거기에 가서야 비로소 그가 활짝 웃을 수 있다는 것의 이 서글픈 아이러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