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3
CA411. 부지영,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9)
어쩐지 신민아와 공효진의 배역을 슬쩍 바꾸어놓고 싶다. 공효진이 거친 나무 도마 위에 칼을 내리쳐 생선의 머리토막을 잘라내는 모습은 어쩐지 낯익다. 어째서 낯익을까. 이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 낯익음을 슬쩍 망쳐놓고 싶은 욕망이 인다. 이것은 신민아가 공효진의 몰골로 생선을 자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에 정확히 대응하는 욕망이다. 보기에는 그럴 법하지만, 그래서 익숙하지만, 어쩐지 조금 망가트려 놓고 싶은 이미지―. 한데, 신민아는 정말 아버지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을까. 혹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나는 신민아가 알았다는 쪽에 어쩐지 마음이 자꾸 간다. 살아오는 동안 적어도 한 번쯤은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짓궂게도 나는 신민아가 짐짓 연극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일종의 자기기만이요 위악이다. 하여 이 반전은 관객한테는 반전일지언정 신민아한테는 반전이 아닌 것이 아닐까. 그렇게라도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궁여지책은 혹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신민아와 공효진의 여행은 아버지를 찾으려는 여행이 아닌 셈이다. 이 경우 아버지는 일종의 맥거핀일 것이다. 나는 신민아의 여행을 커밍아웃으로 규정하고 싶다. 신민아의 커밍아웃.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것. 그렇게라도 커밍아웃을 해서 떳떳하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고 싶은 것. 호명에 대한 의지. 본능. 욕망. 당위. 이제야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고백하는 신민아의 마지막 내레이션에 담긴 참뜻이 바로 이것 아닐까. 그러니 커밍아웃이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 쪽이 아니라, 딸 쪽이었던 셈이다. 이 커밍아웃이 가슴 찡하다.
CA412. 일라이 로스, 〈호스텔〉(2005)
쿠엔틴 타란티노와 미이케 다카시. 돈, 그리고 삶의 권태.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하여 타인의 죽음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의 가공할 만한 억지.
CA413. 홍지영, 〈키친〉(2009)
양산만 파는 가게. 우산과 양산의 차이는? 그게 정말 차이이기나 한 것일까. 단지 색상 때문에? 그 기능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누가 그것을 차이로 규정했는가. 그 고유의 물리적인 성질을 차치하고, 양산을 우산으로 써서는 안 되는 까닭은? 하나의 엄연한 직업으로서 증권맨과 요리사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직업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다루는’ 일인데? 돈이라는 재료와 식재료는 어떻게 다른가. 돈을 대하는 마음과 식재료를 대하는 마음은 어떻게 다른가. 길지도 않은 인생, 하고 싶은 거 하다가 가게 냅둬라―. 이것은 철학일까, 삶의 한 태도일까. 그게 그 소리일까. 스스로 하고 싶은 일과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의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그 여자의 첫마디. 맛이 달라. 분명히 ‘사고를 친’ 건데, 이것이 사고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착목하는 것(곳)은 ‘사고’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이게 정말 연출의 문제일까. 쿨한 척하는 것과 정말 쿨한 것의 차이는? 쿨하고 싶은 욕망과 도저히 쿨해지지 않는 현실의 사이. 심수봉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김태우와 주지훈이 한 인간의 두 자아라면? 신민아는 어느 쪽 자아를 더 좋아하는 것일까. 겉과 속. 겉마음과 속마음. 섹스는 없고 키스는 있다. 일종의 키스 패티시. 그래도 두 남자를 두고 고심하던 신민아의 선택 또는 처신이 ‘두 번 결혼한 아내’ 손예진의 경우보다 더 현실적인 것일까. 공존과 공유의 차이는? 둘에 대한 욕망과 셋에 대한 욕망. 어느 쪽이 더 완전한 욕망일까.
CA414. 야마다 요지, 〈카아베에〉(2008)
요시나가 사유리, 아사노 타다노부, 단 레이, 그리고 야마다 요지. 이 영화를 볼 세 가지 또는 네 가지 이유. 전쟁으로 갖은 고생과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마침내는 스러져 가는 서민들의 가슴 저린 이야기.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적도 없고, 전쟁을 찬성하지도 않았고, 전쟁으로 무언가를 얻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전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언제나 전쟁의 가장 억울한 희생자가 된다는 이 고약하고 야속한 운명. 〈황혼의 사무라이〉(2007)의 둘째 딸, 그리고 〈카아베에〉의 둘째 딸. 이 어쩔 수 없는 겹침. 야마다 요지가 거듭 큰 딸이 아닌 둘째 딸한테 내레이션을 맡긴 의도는? 사무라이와 어머니. 기꺼이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아이들을 지키려고 발버둥 친 어른들의 두 가지 유형. 끝없이 성실하고, 끝없이 순수하고, 끝없이 뜨거운 애정. 무엇보다도 그지없이 순박한, 그래서 더욱 가엾고 딱한 인간 유형들의 잔치. 독일어. 시. 슈베르트. 철학. 데칸쇼. 전쟁의 유일한 교훈은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뿐. 엇갈리는 애정과 엇갈리는 인연. 느닷없고 대책 없는 죽음. 그러나 언제나 예상하고 있는, 또는 예상되어 온 죽음. 곱게 늙은 요시나가 사유리, 너무나 인간적인 아사노 타다노부, 놓치고 싶지 않은 여인 단 레이, 그리고 따뜻한 야마다 요지―.
CA415. 마에다 테츠, 〈돼지가 있는 교실〉(2008)
동물들은 어째서 ‘식’용과 ‘애완’용 또는 ‘반려’용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일까. 어째서 식용 동물을 애완용 또는 반려용으로 기르면 안 되는 것일까. 그 반대는? 그것이 정말 피할 수 없는 동물의 운명일까. 이 운명은 누가 또는 무엇이 정한 것일까. 이 영화는 동물의 그런 운명을 강요하지도 않고, 설득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할 뿐이다. 이 중립성이 귀하다. 더욱이 그 대상이 어린이들임에랴. 어린이들이 생명이라는 테마에 대하여 그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극한치까지 생각해 보는 경험을 한다는 것. 사람들한테는, 어른들한테는 이 극한치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아주 떨쳐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위험하다고 여기는 걸까. 그 핑계로 어른들은 아이들을 그 경험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가두어두며, 이를 보호라는 미명으로 합리화한다, 어쩌면.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생명에 대하여 아프게 생각해 볼 경험의 기회를 놓친다. 그리하여 무신경한 어른으로 커버린다. 이건 좀 곤란하다. 돼지 한 마리를 키워보는 과정이 한 아이가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적어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한데, 같은 식용이라도 돼지가 아니라, 닭이나 송아지였다면 이만큼 살가운 느낌이 났을까. 이건 또 어떤 차이 또는 차별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