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4
CA416. 다키타 요지로, 〈굿’ 바이〉(2008)
그것은 시체를 만지는 일이지만, 어쩐지 그가 만지는 것은 시체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인 것만 같다. 그것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총체인 셈이다. 죽음이 곧 삶이요, 삶의 총체라는 것. 이런 인식의 과정이 있기에 그가 도달하는 어떤 깨달음의 종점이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죽음, 곧 삶의 총체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그지없이 경건하고, 치밀하고, 예의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에서가 아닌지. 그런 손길이 없는 이별은 진정한 이별일 수 없다는 것. 그런 손길을 거쳐야만 비로소 이별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이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첼로를 만지는 손과 시체를 만지는 손. 그 두 손길의 비슷함과 다름. 그 손길의 끝에서 소리는 음악이 되어 공기 가운데 퍼져나가고, 생명은 마침내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요컨대 안식의 출발. 처음과 끝. 시작과 마감. 알파와 오메가. 비로소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순간. 그것을 염습이라고 부르든, 연주라고 부르든, 결국 그런 손길이 우리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필요하다는 것.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삶과 죽음은 결국 같은 것의 다른 국면일 뿐이기에. 그 손길의 촉감이 필요하지 않은 삶이 정말 있을까. 그런 삶은 도대체 무엇일까.
CA417. 이누도 잇신, 〈황색 눈물〉(2006)
어째서 꼭 성공담이어야만 할까. 우리네 삶의 실상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욕망과 평범한 노력과 평범한 실패의 기록. 단 하나, 어떤 삶이든 그 삶이 계속된다는 것만이 돌올한 국면. 이런 사람들이 각기 자기 존재감을 잃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온전한 세상 아닐까 싶은, 도저히 덮어둘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생각. 정말 타고난 남다른 재능과 초인적인 노력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인 걸까.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 걸까. 평범한 예술가로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일이 어째서 드문 것일까. 어째서 세상은 예술가 지망생들한테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 착하고 모질지 못한 사람들은 어째서 독한 야심가들한테 항상 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그렇게 소박한 차원에서 자신의 평범한 재능과 소박한 야심을 그런대로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째서 허락되지 않을까. 어째서 88만 원의 삶조차도 그들에게는 사치인 걸까. 이것이 정말 그토록 과한 욕심일까. 그들의 남루한 흰색 속옷 차림이 오래도록 가슴 한 귀퉁이를 저민다. 여름이 아니라 추운 겨울이었다면 그들의 삶은 또 얼마나 팍팍했을까. 그러니 이 경우 계절은 그나마 한 가닥의 위안이다.
CA418. 모치즈키 토모미치, 〈바다가 들린다〉(1993)
왜 바다가 ‘부른다’나 바다가 ‘보인다’가 아니고, 바다가 ‘들린다’일까. 바다는 보는 것일까, 아니면 듣는 것일까. 바다는 손짓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리치는 것일까. 어쩐지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추억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분명히 든다. 시각보다는 청각.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출발은 시각이다. 단 한 순간, 그 일별. 어쩌면 헛것. 그 헛것이 불러일으키는 추억. 그리고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 한데, 걸어서 가는 것과,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과, 기차를 타고 가는 것과, 배를 타고 가는 것과,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학교와 선생들의 처사에 맞서는 것으로 얼마든지 연대할 수 있었던 시절. 그 연대감의 설렘과 흥분. 전학을 온 낯선 동급생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까닭 모를 호의와 적의. 이성한테 첫눈에 반하는 현상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한데, 내가 한눈에 반한 상대는 어째서 나한테 똑같이 한눈에 반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현상은 어째서 대개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까. 수학여행을 하와이로 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투리의 상대성. 도쿄 사투리. 빌려 간 돈을 제때 갚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갚는 것으로 끝내고 싶은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까. 셀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 그 이상한 매력. 향수 같은 것. 이런 이야기에서는 왜 꼭 여자 쪽이 당돌한 것일까. 어째서 이성 문제로 동성이 갈라지는 것일까. 코치, 도쿄, 교토. 욕조에서 자는 사람. 어째서 사랑의 감정은 이토록 뒤늦게 떳떳해지는 걸까. 꿈은 어째서 흔히 깨고 나서야 그게 꿈인 걸 알게 되는 걸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깰 수만 있다면? 또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문득, 나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CA419. 구마자와 나오토, 〈무지개 여신〉(2006)
굽어 있지 않고 가로로 일직선인 무지개. 일명 환수평 아크. 드문 자연 현상. 마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끈이나 다리 같은. 거기에서 출발한 인연. 그리고 느닷없는 죽음. 또는 죽음의 소식. 지인의 죽음을 매스컴을 통하여 처음 알게 될 때. 시각장애, 그리고 언니 잃은 슬픔에 빠진 아오이 유우. 〈피터팬의 공식〉(2006, 조창호)의 온주완을 닮은 이치하라 하야토의 매력. 그리고 이미 죽어버려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우에노 주리. 스토커라는 말 자체가 없던, 또는 널리 통용되지 않던 시절에 스토커 노릇을 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취급을 받았던 것일까.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이성에 대한 접근이 수월했을까.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가 막혀 있는 택시. 1만 엔권 지폐로 묶은 반지. 첫 접촉과 첫 목격. 후회 없는 청춘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소망인지를 때맞춰 자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긴 그래서 청춘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잔잔한 회한과 슬픔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참 이상한 점은 그 회한과 슬픔이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눈은 있는데, 볼 수는 없는 사태. 어쩌면 이것은 바로 그런 청춘의 일회성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 때가 되면 사람은 왜 취직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걸까. 그저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남들이 다 하니까? 짝이 없어 외로운 사람들끼리 사귀면 그 외로움이 절반으로 줄어들까, 아니면 배로 늘어날까. 사귀는 감정과 결혼을 결정하는 감정은 어느 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그걸 판별할 수 있을까.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는 행위, 프러포즈. 받건 주건. 지구의 종말과 나의 종말. 지구가 끝나면 나도 끝나고, 내가 끝나면 지구도 끝난다는 것. 어느 쪽이 맞을까. 사랑이 동시에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동시에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알아차리고 나면 그것은 언제나 동시에 시작된 것이 아닐까. 동시에 시작했는데도 어째서 이어지지 않을까. 역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지개 같은 것일까, 사랑은?
CA420. 요시다 케이스케, 〈카페 이소베〉(2008)
아침에 일어나면 이런저런 볼일들을 본 다음 각기 어딘가로 가야 한다. 딸은 학교로, 아빠는 일터로.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어째서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가고 싶지 않지만, 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자꾸 가다 보니 어느덧 가지 않는 상태를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걸 과연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느닷없는 죽음과 기다리던 죽음의 차이. 일언천엔(一言千円). 찢어진 가족. 그러나 다시 붙을 의지가 없는 가족.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일을 그만둔 사람은 어째서 계속 잠만 자게 되는 것일까. 아무리 자도 잠이 부족한 기이한 현상. 충분한 잠이란 어느 만큼의 잠일까. 작용과 반작용. 부모의 작용에 대한 자식의 반작용. 이때 부모는 자식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작용에 대한 반작용은 긍정의 방향일 수도 있고, 부정의 방향일 수도 있다. 카페 이소베. 순끽다(純喫茶) 이소베. 그러니까 이건 우리로 치면 ‘다방’이라는 뜻이다. 구식이다. ‘캐러멜 마키아또’가 없는 카페. 요즘은 캐러멜 마키아또 따위엔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당시에는 그게 빠진 카페에는 손님이 몰릴 턱이 없다. 이소베 씨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셈. 그러나 이 착각이 한심할지언정 밉지는 않다. 일종의 시대착오. 하지만, 이 시대착오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한데, 자전거를 둘이 타면 왜 안되지? 위험해서? 설마! 여전히 엇갈리는 마음, 여전히 엇갈리는 인연. 속임수와 착각. 속이는 쪽과 속는 쪽. 이 경우 어느 쪽이 더 딱할까. 도대체 그 카페는 그 아버지와 그 딸한테 어떤 의미였을까. 마지막 순간 그 딸이 흘린 눈물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이 안쓰럽고 밉지 않은 부녀를 어떻게 도와줄 방도가 없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