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5
CA421. 안도 히로시, 〈블루〉(2001)
교복 입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시험을 보는 풍경. 조용하고 치열하고 우울하다. 샤프심이 부러지는 순간.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친구. 옥상에 모여 앉아 도시락 까먹기. 학생의 행동거지에 대한 노회한 선생님의 판단은 어째서 늘 이토록 독단적일까. 학생이 받을 상처에 대한 믿기 힘든 둔감. 쉬는 시간 또는 점심시간 매점 풍경의 활기. 참 이상한 것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고르라면 학창 시절을 꼽게 된다. 도대체 왜? 웃는 옆얼굴의 입매가 박진희를 살짝 닮은 이치카와 미카코. 타키코미 밥. 담배는 어째서 탈선이나 반항의 징표가 된 것일까. 담배를 피우려고 성냥을 긋는 친구의 손짓을 가리켜 예쁘다고 말하는 친구. 같은 학생의 처지라는 이유만으로 느껴지는 연대감의 매혹, 또는 청소년기를 무사히 통과하는 데 이바지하는 몇 안 되는 비결의 한 가지. CD, 화집. 취미의 공유. 〈박치기!〉(2004, 이즈츠 카즈유키)와 〈크로우즈 제로〉(2007, 미이케 다카시)의 다카오카 소스케의 짧고 인상적인 등장. 스스로 가족한테 폐를 끼치고 있다고 여기는 아이들의 현실 적응력. 연대 또는 사랑. 음악이 적다는 사실이 이 영화에서는 장점으로 기능한다. 정물화의 시작. 한데, 왜 하필 포도일까. 정물화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 스케치북에 물감을 덧바를 때의 긴장. 바다가 있는 마을. 그 시절 그들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물리적 변이(또는 변화)와 화학적 변이(또는 변화)―. 신체의 성장과 마음의 성장. 나는 너의 두 번째지만, 너는 나의 첫 번째라는 고백의 운명적인 아픔. 왜 항상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것일까. 이런 승리가 진짜 승리일까. 여기서 멈추었으면 싶은 시절. 여기서 더 나아간 그 뒷날의 이야기는 어쩐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그 순정함―.
CA422. 쓰쓰미 유키히코, 〈붕대클럽〉(2007)
붕대는 밴드가 아니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감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붕대로 감아야 하는 상처는 밴드를 붙이면 될 만큼 작은 상처가 아니다. 어째서 나이가 들면 나 자신이 무언가로 자꾸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중요한 그 무엇이 자꾸 사라지는, 또는 소모되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길 줄 모르는 이상한 어른으로 커버리고, 그런 어른들이 마침내는 세상을 망친다. 이 흐름, 이 방향이 반대면 안 되는 걸까. 한데, 어째서 상처 난 곳을 붕대로 휘감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일까. 붕대는 어째서 흰색일까. 붕대의 기능이 그저 감기만 하는 것이라면 붕대로 감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일까. 야기라 유야, 괜찮게 컸다. 아니, 괜찮게 크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 시점에서? 사람은 탄생을 선택할 수는 없어도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선택할 수는 있어도 그 선택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상적인 상태의 선택이 되기가 어렵다. 내 상처가 내 속이 아니라, 내 밖에 있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것을 붕대로 감싸줌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면? 내 속의 상처는 붕대로 감을 수 없으니까. 이 착상이 놀랍다. 세상에는 사랑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소녀. 괴짜의 탄생. 이걸 패배주의나 책임 전가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도 열역학 제1법칙은 성립하는 것일까. 그래서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면 다른 누군가는 그 일로 새로이 상처받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상처의 총량은 결국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일까. 사회도 마찬가지다. 누가 고용되면 누구는 해고된다. 누가 해고되면 누구는 고용된다. 그래서 고용 상태는 균형을 유지한다. 그래야 한다. 그러니 그 균형은 깨뜨리면 안 된다. 멘고, 멘고. 고멘, 고멘. 거꾸로 말하기. 한데, 상처를 치료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또, 지구 전체를 붕대로 휘감으면 인류가 앓고 있는 상처의 총량이 제로가 될까. 진심으로 불화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화해할 수 없다는 것. 고얏케사. 어쩌면 인류가 짊어지고 있는 상처의 총량은 지구보다 더 무거운 게 아닐까. 엄마의 낡은 구두. 삶이란 결국 상처들의 총량인 걸까. 그래서 결국 삶을 끝까지 살아내려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걸까.
CA423. 마이클 해트너 & 카르스텐 킬레리치, 〈미운 오리 새끼와 랫소의 모험〉(2006)
마침내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는 떠나지 않고 남는다. 이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백조는 오리가 아닌데? 오리의 사회는 백조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백조는 오리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백조는 꼭 오리의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것일까. 종이 다르기에 번식조차 할 수 없는데도? 백조가 떠나 주는 것과 떠나지 않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오리의 사회에 더 좋은 사태일까. 꼭 백조가 남는 것이 오리의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머지않아 백조는 오리의 사회에 남은 것을 후회하게 될까. 이 경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남기로 결심한 백조 쪽일까, 아니면 그런 백조를 받아들이기로 한 오리의 사회 쪽일까. 백조와 오리는 끝내 행복한 공동체로 남을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의문은 그런 선택에 대한 존중과는 무관한 것이다. 선택은 선택대로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또 책임대로 남는다. 이 대차대조표에는 에누리가 없다. 이 냉엄한 지불의 경제학.
CA424. 니나가와 유키오, 〈뱀에게 피어싱〉(2008)
뱀처럼 혀가 갈라진 인간. 이럴 때는 왠지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건 자연스럽게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가른 것이지만. 피어싱을 위해 살을 뚫는 것과 자학의 일환으로 상처를 내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른 걸까. 이것이 어떤 표현이라면, 이 표현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문득 떠오르는, 저 〈나라야마 부시코〉(1983, 이마무라 쇼헤이)에서 할머니 오린이 자기 앞니를 바위에 짓쳐 부러뜨리는 장면. 고통을 참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느닷없는 오구리 슌과 후지와라 타츠야. 아마데우스의 ‘아마’. 루이뷔통의 ‘루이’. 남자 친구가 살인범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이중성. 오래도록 아끼고 싶은 마음과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 사랑, 그리고 죽음, 또는 살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다? 문신의 기원. 문신은 처음 어떤 욕망 또는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을까. 이것은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이로써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몸을 뚫어서 장신구를 끼워 단다는 착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그저 노예의 표시라고만 보기에 그것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그 모든 것이 고통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눈이 없는 용과 기린. 달아날 수도 없고, 날아갈 수도 없는. 헤어질 수도 없고, 배신할 수도 없는. 영원히 함께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한. 그 여자를 괴롭히는 것의 진짜 정체는? 서로 잘 어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과연 결혼의 충분조건일 수 있을까. 이름을 모르면 실종신고도 할 수 없다. 구제 불능의 인간형. 어째서 운명과 관련한 일은 준비하고 있을 때 찾아오지 않을까. 살인범이 피살자가 되었을 때. 화룡점정. 떠나도 상관없다는 것. 이별의 각오. 자유의 획득. 건강한 체념 또는 달관. 몸속에 강이 흐른다. 비로소 살아간다.
CA425. 장훈, 〈영화는 영화다〉(2008)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영화는 영화다. 이보다 더 도저한 명제가 또 있을까. 하지만 도저하기에 이 명제에는 계속 시비가 걸린다. 영화는 영화고, 삶은 삶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누가 이걸 모를까. 하지만 착각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법 아니던가. 한데, 삶을 영화로 착각하거나 영화를 삶으로 착각하는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착각 좀 하면 어떻기에? 착각할 자유조차 없다면 영화가 아닌 삶은, 영화와 비슷해도 분명히 다른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삭막한가. 꼭 영화는 영화이며, 삶은 삶이며, 현실은 현실이라고 표나게 강조해야 하는 걸까. 착각하며 살 권리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그 착각이 빚어내는 그 어떤 운명의 궤적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하겠지만. 그러니 소지섭은 꼭 그런 모습을 강지환에게 보여주어야 했던 걸까. 그런 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깨달음은 꼭 유의미한 것일까. 이건 너무 되바라진 충고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