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6
CA426. 제임스 맨골드, 〈아이덴티티〉(2003)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1986년의 대법원 판결. 자신이 왜 사형을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죄수를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미국의 외딴곳에 있는 모텔은 범죄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현장이 아닌가 싶을 만큼 그 분위기가 유혹적이다. 분열된 정신. 분열된 주체. 갈기갈기 찢긴 발화의 주체. 다성(多聲). 이건 일종의 창작의 정신 구조이기도 하지 않을까. 정신병자의 발화와 작가의 발화. 정신병자의 상상과 작가의 상상. 정체성 일탈. 다중인격증후군. 살인은 정신이 한 것일까, 몸이 한 것일까. 분열된 인격을 한자리에 모아 자폭하게 만드는 것. 벌은 어느 쪽에 내려야 하는가. 정신인가 몸인가. 살인을 저지른 자아와 벌을 받는 자아. 그 자아가 소멸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면? 형벌은 육체에 내려야 하는 것인가, 정신에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 이것은 과연 의미 있는 질문인가?
CA427. 앤 폰테인, 〈코코 샤넬〉(2009)
낯선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어린 여자아이. 설렘보다는 공포. 버림받는 느낌.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아버지. 버릴 것이라면 차라리 이처럼 확실하게 버려주는 것이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이 지나치게 가혹한가. 자신한테 어울리는 이름 찾기. 그 이름에서부터 그의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것. 전문가는 어째서 비(非) 전문가 또는 미(未) 전문가한테 불친절한가. 패션이 한갓 바느질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 생존의 본능과 성공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가. 내 존재에 누군가가 매혹되는 사태. 또는, 내가 누군가에게 매혹되는 사태. 처세의 무기. 야심과 소망의 차이는? 욕망과 재능의 상관관계. 자살하지 못한 이유가 말(馬)에 대한 애정? 옷이 감행하는 사람에 대한 발언. 일종의 존재 증명. 기존 전통 복장의 무엇이 그 여자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 코코의 전진은 운의 결과일까, 노력의 결과일까. 말을 좋아하는 것과 여자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안목과 고집은 서로를 보완한다. 사랑해서 행복하지 않다면 왜 사랑하는 것일까. 코코의 의상 철학은 어쩌면 휴머니즘이 아닐까. 집중과 집착의 차이는? 코코는 어느 쪽일까. 비(雨)는 어째서 섹스의 훌륭한 배경이 되는 것일까. 자동차 핸들은 어째서 둥근 모양이 된 것일까. 여자에 대한 남자의 호의, 그 정체는? 호의를 호의로 느끼기는 하지만, 정작 그 정체는 모른다는 것.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결혼을 왜 하는 것일까. 코코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옷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것. 옷과 옷의 어울림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였다는 것. 코코의 고민과 샤넬의 고민. 친절한 아마추어에서 불친절한 전문가로 도약하기. 마침내 자기 것, 자기만의 오리지낼러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 그것이 모자(帽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코코의 옷은 벗기기가 쉽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욕망에 충실히 복무하는 옷. 세상에 멀쩡한 옷은 없다. 코코가 만지는 순간 비로소 멀쩡해진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여인, 코코와 에디트. 자동차 사고와 비행기 사고. 운명이라기보다는 예술의 질투, 인간에 대한. 옷과 노래. 그러니 예술가들의 온갖 기행(奇行)은 결국 예술가가 못 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못된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이니까. 예술가의 고통이 쾌락의 바탕이라는 이 가혹한 인식. 예술가가 이기적인 것은 예술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일요일을 가장 싫어한 여인. 앙드레 김도 그토록 싫어했다는 일요일. 신조차도 일을 그치고 쉬었다는 일요일. 그러니 예술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신만큼이나, 아니, 신보다도 더욱 이기적인 예술이라는 것―.
CA428. 박신우,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손예진, 아니 유미호는 유키호만큼이나 충분히 악녀인가. ‘하얀 어둠’ 속을 당당히 걸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딱 그만큼의 추함과 딱 그만큼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는가. 아무리 밝은 곳을 걷고 싶어도, 또는 그렇다고 오해해도 그 여자가 걷는 곳은 결국 하얀 어둠, 곧 백야(白夜)일 뿐. 백야는 하얗다 뿐이지, 그래봤자 결국 밤이다. 밤의 일종이다. 낮이 아니다. 이 엄연한 사실. 기껏해야 백야를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걸 미호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은 결코 환한 대낮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요한(고수)은 스스로 백야가 아니라, 환한 대낮에 속할 수 있다고 자꾸 착각한다. 그러니 요한은 결코 미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슬픔―. 이로써 둘 사이의 승패는 처음부터 자명했던 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승자인 미호가 패자인 요한을 백야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임에랴. 결국 이 이야기의 긴장감은 바로 이 국면에서 이루어지는 둘 사이의 길항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요한은 요한이고, 미호는 미호다. 이 인식에서 미호는 요한보다 한 발짝 더 앞서 나아가 있다. 백야가 환한 대낮이 아닐진대 백야를 걷기로 작정한 미호를 인정해 줄 수밖에.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형사 한동수(한석규) 또한 패자 쪽이다. 그래서 그는 미욱하게도 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것이다. 미호는 결코 백야행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백야를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자기 분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은 오직 미호뿐이다. 그런 존재는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 둬야 한다. 왜냐하면, 몸 담고 있는 세계 자체가 다르니까.
CA429. 박찬옥, 〈파주〉(2009)
은모(서우)의 걸음걸이, 그 변화. 사람의 걸음걸이는 일평생 바뀌지 않는 것인데, 그 사건 뒤 은모는 그전과 다른 모양새로 걷는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른.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그 사건은 은모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던 것일까. 그 사건으로 은모 몸속의, 또는 마음속의 무엇이 바뀌었기에 걸음걸이가 달라진 것일까. 감독은 어째서 이것을 걸음걸이의 변화로 표현하려 했을까. 나는 중학교 시절 은모의 걸음걸이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그걸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든 다 나쁘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관객뿐이다. 물론 이 진실은 검증된 진실이 아니다. 검증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바뀌는 진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진실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 진실에 대한 공포. 하지만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실을 덮어두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진실은 그 언니 은수(심이영)의 죽음이다. 그 죽음의 기술적인 측면이다. 그 죽음의 물리적인 원인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진실이다. 이것은 과학적인 수사와 ‘관계자’의 정직한 증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다음 단계는 온전히 진실 고유의 영역이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그러니 언니의 죽음, 이 한 가지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 짐짓 숨겨서가 아니다. 진실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기에 인간은 진실을 알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딘가 모르게 모호한 그 상태를 즐기면서. ‘분명한 것’은 즐길 수 없다. 또는 견딜 수 없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이 영화가 안개를 찾아간 것은 그래서다. 안갯속에서 인간은 갑갑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하다. 그렇지 않다면 안개를 이토록이나 오래 견딜 수 있을 턱이 없다. 이것만은 진실이다.
CA430. 쿠엔틴 타란티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양측을 통틀어 가장 거친 녀석들만이 살아남았다는 것. 그러니 이 영화의 결말은 현실주의의 편에 단단히 발붙이고 서 있는 셈이다. 억울한 죽음 천지인 가운데 최고의 악질만이 살아남는다는 것. 히틀러도 최고로 거친 축에는 들지 못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는 마지막 순간 영화 한 편을 보고 여지없이 흔들리는 약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니 이 영화 속의 히틀러는 유감스럽게도 최고수는 아닌 셈이다. 괴벨스는 그에 비하면 거의 찌질이에 가깝다. 그는 정말 딱하리만큼 맥없이 훌쩍거린다. 끝까지 살아남고 싶다면 최고의 악질이 돼라. 아니면, 최고로 거친 녀석이 돼라. 이것이 이 영화의 전언이다. 퍽 쿠엔틴 타란티노다운 전언. 빅터 프랭클도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최고의 악질만이 수용소의 참경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참 냉엄한 진실이다. 또는, 진실은 냉엄하다. 이걸 멋지게 포장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이’ 쿠엔틴 타란티노를 칭찬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