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88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8

by 김정수

CA436. 트란 안 홍, 〈나는 비와 함께 간다〉(2009)

탐정. 실종된 사람 찾기.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 실종의 까닭 또는 기원. 탐정한테 필요한 자질은 추리력일까, 끈기일까, 체력일까, 아니면 격투 능력일까. 필리핀. 고아원. 부자 관계. 강력한 아버지와 반항아인 아들. 사람은 없고 죽었다는 소식만 있다. 죽음 또는 살해. 죽은 것이 확실해 보이는 정황과 진짜로 죽은 것의 차이. 홍콩. 전직 경찰만이 내뿜을 수 있는 아우라. 다른 사람의 상처를 자기한테로 옮겨오는 방식의 치료. 또는 분담. 병을 가져오는 것과 상처를 가져오는 것. 심지어 중독마저도―. 이건 좀 심하다. 무엇 때문일까.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 나한테는 있지만, 타인한테는 없는 것. 범인을 쫓는 것과 그 과정에서 범인한테 물들기. 빙의 또는 이입. 범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위한 궁여지책. 하지만 여기서 파괴되는 것은 범인일까 형사일까. 체포당하기를 선택하는 범인. 그런 일이 아니고는 잡을 수 없는 범인. 이병헌의 장도리. ‘수동포’는 어찌 된 이름일까. 가져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상처와 그렇지 않은 상처. 상처의 깊이. 치료에 대한 의무감과 욕망. 어쩌면 예수님의 치료도 그런 성격의 것이었을까. 희생과 치료. 언제부터인가 편히 잠들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병이 나으면 치료해 준 사람을 떠나야 한다는 것. 강기슭에 닿으면 타고 온 배를 버려야 하듯이. 치안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공간의 필요성. 그가 어디에 있는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지는 단계. 연쇄살인범과 교감을 이룬 경험. 사람 시체를 먹는 연쇄살인범. 죽이는 것과 먹는 것. 언제나 붙어 있는 것. 죽지 않는 사내. 치료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랑일까.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 막는 사람과 돕는 사람. 고통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살아 있음의 증거. 그리스도의 수난. 치료와 고통. 아들은 아버지한테로 가야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고, 다시 데려온다. 사람을 쳐 죽이는 장도리와 손바닥의 못을 빼는 장도리. 그 기능의 차이. 이쪽에서는 죽이고, 저쪽에서는 살린다. 복음서. 되풀이. 그러나 다르다는 것.


CA437. 관금붕, 〈란위〉(2001)

자유의 박탈과 규제가 사랑을 아픈 것으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면? 아마 모든 동성애, 또는 성소수자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그렇지 않을까. 자기들만의 보금자리에 대한 욕망, 모든 연인의. 만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의심받는 관계. 조마조마한 것도 쾌감일 수 있을까. 연인들은 어째서 반드시 싸우게 될까. 아니, 싸워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가까운 것일까. 연인의 경우에도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은 참 아픈 필연이다. 그 이별의 느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어서 결혼하는 것일까. 양성애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 성적 취향일까. 연애는 동성과 하고, 결혼은 이성과 한다는 것. 그럴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느닷없는 이혼. 아니, 느닷없는 이혼의 소식. 그 전과 후, 앞과 뒤를 어째서 이렇듯 갑자기 붙여놓은 것일까. 그럴 줄 알았다는 냉소? 역시 그렇구나, 하는 연민?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샴푸 냄새. 연인의 이별. 그 책임은 떠난 쪽에 있는 것일까, 붙잡지 않은 쪽에 있는 것일까. 헤어졌던 연인들의 재회. 떠났던 쪽과 붙잡지 않았던 쪽, 어느 쪽이 이 재회를 더 반길까. 한데, 어째서 가슴이 이렇게 서늘할까. 뜨거운 사랑과 깊은 사랑, 어느 쪽이 진짜 사랑일까. 역시 뜨거운 사랑 쪽일까. 깊은 사랑 쪽으로 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일까. 하지만 뜨거움이 깊이로 변하지 않고, 또는 변하기 전에 식어버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또 느닷없는 죽음. 이 불친절한 컷. 하지만 어째서? 왜 슬픔은 늘 살아남은 자의 몫일까. 영원한 이별. 남는 것은 회억(回憶)뿐.


CA438. 이한, 〈내 사랑〉(2007)

여자는 어째서 남자의 과거에 매혹되는가. 또는 어째서 이렇게 설정하는가.


CA439. 미이케 다카시, 〈이겨라 승리호〉(2009)

얏타맨. 유치찬란의 기이한 카타르시스. 우리와는 정서의 차원에서 어딘가 잘 안 맞는 느낌의 바탕. 저팔계, 사오정. 이런 경우 일당은 어째서 항상 셋일까. 주방 기구. 성배 또는 돌덩이의 전설. 제5원소. 갈라져 있는 것을 다 모아 결합해야 한다는 설정. 고고학 또는 탐험. 인디아나 존스. 채찍. 아빠 찾아 3만 리. 엄마를 찾는 아들, 아빠를 찾는 딸. 이 기하학적인 대비. 사라지는 사물. 사라진 화요일. 변신과 합체. ‘이집트’가 아닌 ‘오집토’. ‘알프스’가 아닌 ‘할프스’. 익숙한 주제가에 대한 이상한 향수. 에너지와 에네르기, 이 발음 또는 발성의 차이. 미이케 다카시 특유의 성적 농담. 실은 그들이 정말로 꿈꾸는 것.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유머. 원작 만화 성우들의 카메오 출연. 왜 용서를 못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정작은 용서하기가 싫은 것이면서. 이 책임 전가의 표현. 사랑의 감정이 정리되면 오래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대결의 국면이 펼쳐진다. 흐트러진 시공의 틈. 시간여행. 그리고 도둑질. 용기. 연대. 어떻게 해서든 엉뚱하고 기발하게, 라는 원칙.


CA440. 안노 히데아키 & 마사유키 & 쓰루마키 가즈야, 〈에반게리온: 파〉(2009)

붉은 바다, 파란 하늘, 녹색 또는 연두색 초호기. 그리고 소년과 소녀들. 과연 그것은 지구의 위기일까, 인류의 위기일까. 그 둘은 과연 운명공동체일까. 아니, 그 둘이 운명공동체여야 할 필연적인 까닭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해석해도 될까. 에반게리온은 과연 로봇일까. 에반게리온의 정체성을 로봇으로 규정해도 될까. 피를 토하는(!) 로봇. 일명 생체전투병기. 이 가혹한 생물학적 양식. 내가 에반게리온 자체를 좋아하기 힘든 까닭. 생물학보다는 기계공학 쪽이 내 체질에 더 잘 맞기 때문. 거대로봇 계열에서 에반게리온은 기계공학적인 매력이 덜하다. 그래서 모종의 거북함이 계속 따라다닌다. 청체 불명의 거대 전투 병기, 사도. 도대체 인류는 무엇에 맞서 싸우는 것이며, 그 싸움을 통해서 어디에 가 닿으려는 것인지. 하긴 이에 대한 답을 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쪽에서 마련해야 할 의무란 없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채로 끝날 수도 있다. 성경말씀 그대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기에. 지나가지 않는다면 바로 그곳이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지점이라는 뜻일 테니까. 궁금하지만 답을 원하지는 않는 이 기이한 심리상태. 이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불가사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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