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9
CA441. 진가상, 〈화피〉(2008)
중국고전소설. 견자단의 창 솜씨. 요괴 이야기. 남자를 유혹하고 여자를 심란케 한다. 어째서 인간은 요괴한테 농락당하는가. 그 반대의 일은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가. 인간은 어쩌다 이런 상상에 사로잡혔을까. 요괴가 있다면 퇴마사도 있다는 것. 요괴와 인간의 행복한 공존이 어려운 까닭은? 사람의 심장을 먹어야 사람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는 요괴. 사람 피를 빨아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뱀파이어. 1녀 2남의 삼각관계와 2녀 1남의 삼각관계가 얽힌 구도. 여기에 남자 요괴―또는 수컷 요괴―가 끼어든 또 하나의 삼각관계가 걸쳐져 있는 형국. 르네 지라르, 욕망의 삼각형―. 구미호와 퇴마사. 선택에 대한 책임감이 불러일으키는 죄책감. 하기야 이건 어쩌면 실제 그런 여자들에서 비롯된 상상인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는 그런 요괴 같은 인물들이 분명 있으니까. 자신의 본모습을 교묘하게 숨긴 채 뜻을 이루는 유형의 사람들. 일종의 소시오패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지닌 생존본능의 한 가지일지도 모른다. 요괴를 첩으로 들이지 않으려는 그 남자의 본마음은? 여자 요괴―또는 암컷 요괴―를 먹여 살리는 남자 요괴―또는 수컷 요괴―의 구도. 〈렛 미 인〉(2008,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그림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늙지 않으려고. 늙을 수도 있는(!) 요괴. 조금은 잔인한 인어공주 스토리. 결국은 마음의 문제다. 요괴든 인간이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열쇠라는 것. 문제의 최종적 해결 방법은 결국 희생이다.
CA442. 두기봉, 〈대행동〉(1988)
성시특경(城市特警), The Big Heat. 손바닥을 드릴로 뚫는 이미지. 악몽, 또는 아픈 기억. 인질한테 총을 쏴서 범인을 제압하는 방법. 말을 듣지 않는 손. 그래서 총을 뜻대로 쏠 수 없는 형사. 신체 훼손에 대한 집착. 잘려 나가는 머리. 끊겨 나가는 손가락. 간호사 왕조현. 손바닥에 볼펜으로 전화번호 써주기. 말레이시아와 홍콩. 차량의 거울을 이용한 범인 탐색 장면의 유니크함.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이를 집어던지는 범인. 그 아이를 받아내느라 범인을 놓치는 형사. 총에 맞고, 차에 치이고 깔려서 엉망이 된 범인의 신체. 홍콩 도심에서 찍은 홍콩 영화들을 보면 주변 사람들에 대한 통제를 아예 포기한 듯한, 또는 방임한 듯한 장면들이 적지 않다. 이게 이상한 소격효과를 빚어낸다. 말 그대로의 스카페이스(scarface). 범인은 어째서 자기 몸, 특히 얼굴에 난 상처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가. 금발의 백인 여자가 간호사로 위장하여 숨어든 화장실 장면. 중국인 여자 간호사를 품에 앉고 변기에 앉아 위기를 모면하려다 역시 거울 때문에 발각되는 장면. 몸이 반으로 절단된 범인. 돈을 미련 없이 허공에 날리는 형사들. 돈은 어째서, 하필이면 종이로 만들게 된 것일까. 고속(高速) 전개. 기발한 액션. 가차 없는 부상과 죽음.
CA443. 에란 리클리스, 〈레몬 트리〉(2008)
레몬 농장. 과수원. 낯선 이웃의 이사(移徙).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 졸지에 권력자의 이웃이 되어 의심받을 때. 이스라엘 국방장관. 그 집에서 쓰는 한국산 컴퓨터 모니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뒤섞여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 적이자 이웃인 사이. 국경지대의 공포. 국가적이고 군사적인 조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서민의 심리적 좌절. 살마 지단. 이 한 여자. 주거의 권리를 지키려는 힘겨운 싸움. 항의. 이스라엘 국민으로서 팔레스타인 사람이 처한 현실의 이 기이한 맥락. 도움을 청하는 일이 어째서 괴롭히는 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스라엘 국방장관으로, 이웃으로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곤혹스러움. 보상금을 떳떳하게 받을 수조차 없는. 왜 하필 레몬일까. 레몬은 시다. 요리의 보조 재료다. 대대로 물려받은 생업과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들 가운데 이것은 어느 만큼 정당한가. 인권 침해. 무엇이 한 서민 여인을 투쟁가로 만드는가. 군사적인 목적에 부합하니, 보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군사 법정과 대법원. 과수원이 위험하다는 정보국의 판단. 부당한 일에 맞서는 것이 항상 지지받지는 못한다는 것. 여자에게 패물의 의미는? 남편의 사진.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의 사진. 이 지단과 저 지단. 남자 지단과 여자 지단. 외로운 늑대. 늑대 울음소리. 라디오 방송. 감기에 걸린 사람은 레몬과 오렌지의 냄새를 구별하지 못한다? 레몬 나무가 국방장관을 이길 수 있을까. 이건 어떤 싸움일까.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의 존재 의미는? 레몬 전쟁. 분쟁.
CA444. 정지우, 〈은교〉(2012)
실제로 제3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였다. 박해일은 어째서 김무열을 거두어준 것일까. 박해일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내뱉은 말 ‘새경’은 그가 김무열을 제자가 아니라, 머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떤 인간도 자신을 머슴 취급 하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김무열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공자님 같은 진짜 ‘스승’의 자질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갓’ 시인이었지, ‘스승’이 아니었다. 스승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감히’ 스승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박해일이 소설을 김무열 대신 써준 행위는 어떤 면에서도 제자를 위한 스승의 행위가 될 수 없다. 김무열이 박해일의 소설을 몰래 훔쳐서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행위가 제자의 행위일 수 없는 것처럼. 남은 것은 김고은, 은교의 정체다. 도대체 그에게 은교는 누구였을까. 아니, 무엇이었을까.
CA445. 브라이언 길버트, 〈와일드(WILDE)〉(1997)
오스카 와일드. 어째서 이성애는 그저 소재에 지나지 않고, 동성애는 아직도 이슈가 되는 것일까. 그리스에서는 아폴론 상을 방 안에 두면 예쁜 아기를 낳는다는 말이 있다. 와일드는 이 아폴론 상을 자기 방에 두고 지냈다. 어째서? 아내를 그지없이 친절하게 대하지만, 아내를 사랑하지는 않는 남자. 초상화와 사진은 어떻게 다른가. 사진은 단 한순간의 모습일 뿐이지만, 초상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래서 사진에 담기지 않은 더 많은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것. 이건 정말일까. 사진이 이미 예술이 되어 있는 지금도 그것은 옳은 명제일까. 젊어지고 싶다는 것, 또는 젊은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 이것은 과연 모든 사람의 소망일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원더미어 부인의 부채. 와일드 주변의 남자들. 키 크고 우람한 체구의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주변을 맴도는 키 작고 ‘예쁜’ 남자들.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버림받는다. 이 어쩔 수 없는 거래의 현장. 돈 버는 일을 신사가 할 만한 일이 아닌 천박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대. 오스카는 어떻게 자신의 이중생활을 무사히 유지했는가. 완벽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 멋진 애인―. 그것을 가리켜 동성애라고 말할 때와 남색(男色)이라고 말할 때의 차이. 한데, 어째서 여색(女色)이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을까. 아들의 남자 애인을 본 아버지의 심정, 남편의 남자 애인을 본 아내의 심정. 이 모든 관계에서 품위를 유지케 하는 동인(動因)은 무엇일까. 귀족과 중간계급 사이의 심리적 장벽. 사회가 그를 받아들이는 수준이라는 것. 자질로서의 어니스트와 이름으로서의 어니스트. 그것의 중요성. 정직, 또는 정직하게 살기. 한 작가가 시대를 통과해 가는 법. 떠나는 것과 남는 것. 역시 돈의 문제. 또는 자존심의 문제. 나아가 존엄의 문제. 법정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가장 사적인 문제가 논의될 때. 와일드의 선택. 떠나느냐, 남느냐―. 떠나지 않기로 했다면, 어째서? 아내와 아이들이라고 말할 때와 가족이라고 말할 때의 차이. 무엇이 오스카 와일드를 처벌하는가. 징역과 강제노동의 차이는? 〈리플리〉(1999, 앤서니 밍겔라)의 맷 데이먼보다 〈와일드〉의 주드 로. 그가 말하는 이 세상의 두 가지 비극. 사랑을 얻지 못하는 비극과 사랑을 얻는 비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