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87
CA431. 임순례, 〈날아라 펭귄〉(2009)
거북이가 달릴 수 없듯이 펭귄도 날 수 없다. 그 펭귄더러 날아 보라고 한다. 한 번만 날아 보라고. 이 애처로운 권유. 교육열에 불타는 엄마한테 시달리는 아이. 교육열에 불타는 아내한테 시달리는 남편. 어째서 여기서 악역은 엄마 또는 아내일까. 아니, 어째서 그것이 악역인 것일까. 여자들이 그 악역을 떠맡은 것은 자의일까 타의일까. 그 악역에 남자들은 과연 책임이 없을까. 아니, 어떤 책임이 있을까. 이 책임은 충분히 분석되고 있는 것일까. 이 지극히 교과서적인 시나리오. 한데, 영화는 어째서 그렇듯 모두가 한데 어울려 ‘춤추는’ 결말을 향해서 달려간 것일까. 날 수 있는 펭귄만이 누릴 수 있는 결말. 하지만 펭귄은 날 수 없다는 것. 그런데도 펭귄이 굳이 날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 펭귄의 진짜 소망일까. 생활언어의 절반 이상이 영어고, 최종 학력을 영어권에서 얻은 사람들이 지도층이 되는 사회의 앞날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근심. 백년해로를 구걸해야 하는 남자들의 처지. 펭귄은 과연 날아야만 하는 것일까. 날지 못하는 펭귄은 정말 펭귄조차 못 되는 것일까. 거북이가 달려야 하고, 펭귄이 날아야 하는, 또는 거북이가 달릴 것을 종용당하고, 펭귄이 날 것을 종용당하는 사회는 과연 ‘우아한 세계’일까.
CA432. 엽위신, 〈살파랑〉(2005)
견자단의 추락사. 임달화의 병사. 홍금보의 통곡. 이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이 빚어내는 비극성 또는 비장미. 뇌종양. 재판. 무죄 석방. 증거 불충분. 증인 사망, 또는 증인 제거. 주먹 하나로 용의자를 박살 낸 전력이 있는 새 팀장. 퇴직을 앞둔 형사들. 형사란 생업일까, 사명일까. 바다와 경찰. 기타노 다케시의 바다. 바다라는 이름의 아이 돌보기. 존재감의 대결. 세월이 배우의 얼굴에 새겨놓은 존재감의 정체. 범인 체포와 증거 확보의 관계.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어느 쪽이 더 절실한가. 공적 업무의 수행과 사적 감정의 표출. 악의 세력을 상대하기에 다섯(!)은 너무 적어. 끝에 대한 예감, 또는 불행의 징후. 여포 하나를 상대하기가 버거웠던 유비와 관우와 장비. 이 1대 3의 구도, 또는 1대 다수의 구도. 천하제일의 악인. 마지막 액션 장면을 위해서 감정을 쌓아가는 기술. 이걸 기술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때까지 견자단이 다쳐서는 안 되는 이유. 가족을 상대로 다정한 모습을 쌓아가려 애쓰는 남자들. 무엇을 위해서? 그렇다면 집을 떠난 바깥세상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가족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어쩌면 알고 싶지 않고, 그래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결국 같은 처지이면서도 같이 연대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의 남편, 아이의 아비. 홍금보는, 아니, 홍금보의 몸은 어째서 죽지 않는가. 파멸의 연대기. 셰익스피어. 비극.
CA433. 롤랜드 에머리히, 〈2012〉(2009)
이제는 재난영화의 리얼리티를 재난 그 자체의 묘사와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그 진행 과정에서 찾는 시기는 지난 것이 아닐까. 그 재난 속에서 죽어가는 압도적인 다수 인류를 무시하는 이야기의 맹점. 생존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선별되고 선택되었는가. 그 선별과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노아의 방주는 오로지 믿음만이 기준이었는데, 이제 그런 믿음 따위 생존과 구원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 두 당 10억 유로를 낼 재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류 구원의 방주에 승선할 자격이 없다는 것.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것이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기준인지도. 개신교의 중심인 미국의 대통령과 가톨릭의 중심인 이탈리아 수상만이 백성들과 최후를 함께 맞이한다는 설정의 기이한 균형감각. 인도와 중국에 대한 속 보이는 배려. 인류 구원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46개국의 정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된 아프리카의 의미. 재난영화 특유의 영웅이나 희생은 없지만, 그게 과연 재난영화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일까. 어차피 선별을 벗어난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운(運)’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리얼리티. 또는 어떤 섭리. 구원받을 만하기에 구원받는 현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석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것. 결국 재난은 무차별이라는 것. 질병이 무차별인 것처럼. 그러니 그 가족이 구원받을 만하지 않은 ‘찌질한(지질한)’ 가족이라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일까. 새아빠가 어처구니없이 죽은들 그게 무슨 대수일까.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이건 그저 모여 살면 그게 곧 가족인 것을. 한데, 그 바다는 어째서 ‘동해’가 아니라 ‘일본해’일까. 이 무시할 수 없는 ‘사소한(!)’ 무신경. 표기와 번역. 또, 그 거대한 방주는 어째서 잠수함의 형태로 건조되지 않았을까. 또 한데, 대재난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어째서 선거가 없는가. 그 정부는 재난이 끝나거나 해결될 때까지 존속하기로 합의된 결과인가. 영원한 정부에 영원한 백성?
CA434. 조 라이트, 〈솔로이스트〉(2009)
이 영화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볼 수는 없을까. 집집이 신문배달을 트럭으로 할 만큼 길이 넓은 주택가.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 사고로 시작되는 이야기. 특종을 잡는 것과 특종으로 잡히는 것, 어느 쪽이 운명에 더 가까울까. 내가 다가가는 것과 누군가 나한테 다가오는 것, 어느 쪽이 더 운명의 느낌에 가까울까. 베토벤 동상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 베토벤을 표나게 기리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스티비 원더와 바이올린. 이츠하크 펄만과 얏사 하이페츠. ‘베토벤’이라는 ‘말’의 어감은 베토벤의 음악에서 오는 것일까, 그 말 고유의 것일까. 어느 쪽이 어느 쪽을 규정하는 것일까. 특종감을 낚아채는 감각은 타고나는 것일까. 바이올린, 들고 다니기 쉬운 현악기. 첼로, 들고 다니기 힘든 현악기. 베토벤 교향곡 제3번 1악장의 첼로 독주. 이것을 듣기는 처음이다. 소년은 어째서 첼로 소나타를 선택하지 않고 교향곡의 첼로 독주를 선택했을까. 어쩌면 소년은 독주자보다는 단원이 체질에 맞았던 것일까. 그것이 본성이었던 걸까. 이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글만 읽는 사람은 이 소년을 백인으로 생각할까, 흑인으로 생각할까. 그저 감상하는 처지가 아니라 연주하는 처지라면, 그가 끝도 없는 연습의 지겨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겨움은 아예 없는 것일까. 이것도 재능일까. 솔로이스트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본성에 대한 배반이었을까. 도로에 사람이 뛰어들었을 때 자동차들이 일제히 멈춰 서지 않는 까닭은? 달리려는 속성? 설마! 재클린 뒤프레. 야노스 스타커. 죄수 없는 경찰, 환자 없는 의사, 악기 없는 연주가. 현악 4중주 제15번 3악장의 첼로 버전, 또는 오케스트라 버전. 죄와 죽음, 신과 영생. 재능은 있지만, 꽃피우지는 못한다. 환청과 청음. 빛의 소용돌이.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어쩐지 낯익은 애니메이션 〈환타지아〉(1940)의 영상. 이 모든 음악을 베토벤 본인은 머릿속으로만 들었다. 베토벤으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바흐. 청소 또는 비행(飛行). 그에게 정말 필요한 건 음악일까, 밥일까, 친구일까, 신일까, 가족일까. 닐 다이아몬드. 삼중 협주곡. 노숙자. 램프. 어울림을 표현하는 춤. 춤으로 끝나는 영화. 춤이 마지막 장면인 영화. 마지막으로, 교향곡 제9번 3악장의 잊을 수 없는 엔딩 타이틀.
CA435. 던칸 존스, 〈더 문〉(2009)
새로운 에너지원이 달일 수 있다는 상상, 기대, 예측. 알파벳으로 표기된 사랑, 에스 에이 알 에이 엔 지(sarang). 미래의 지구에서 가장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공해일까, 에너지 고갈일까, 기후 변화일까, 식량 부족일까, 인구 감소나 폭증일까. 달은 장차 에너지원으로 쓰이게 될까, 신흥 주거지로 쓰이게 될까. 우주선의 내부는 어째서 한결같이 흰색일까. 역시 빛 때문일까. 빛의 연비를 높이려는 의도? 오래도록 혼자 생활한 인간은 수다쟁이가 될까,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 인간이 우주 어느 곳에서 거주하게 될 때 중력의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해결될까. 그곳의 환경을 인간의 몸에 맞추게 될까, 인간이 자기 몸을 그 환경에 맞추게 될까. 그리고 모차르트, 요한 슈트라우스가 아니라. 환각과 상상의 경계. 기혼자를 3년 동안이나 혼자 달에 머물도록 하면서 성적(性的)인 차원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 몰상식의 시스템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니, 이건 몰상식일까, 비상식일까, 반상식일까. 아니면, 이 몰상식은 물리적인 것일까, 화학적인 것일까, 생리적인 것일까, 윤리적인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숫제 이것이 상식인 것일까. 사람의 몸은 어째서 움직이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도록 설계되었을까. 사람의 몸에 관련된 신의 뜻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었을까. 기계의 목소리는 어째서 남성(男聲)일까. 달에는 왜 대기가 없을까. 아니, 어째서 대기를 붙잡아둘 만큼의 중력이 못 되는 것일까. 태양 에너지는 정말 자연스레 축적되는 것일까. 그것도 채취할 수 있는 성질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 무엇이 지구 밖으로 자꾸 나간다는 것은 지구의 총중량이 점점 더 가벼워진다는 뜻인데, 문제가 없을까.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오리지널과 짝퉁. 음모. 복제인간의 수명이라는 문제. 어눌한 발음의 인사말. “안녕히 계세요.” 몸의 복제와 기억의 복제. 복제된 기억과 주입된 기억의 차이. 기억이 복제된다는 것은 그 기억으로 빚어지는 감정도 복제된다는 뜻일까. 그럼 복제인간의 마음의 고통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할까. 복제인간들끼리의 동병상련 또는 연대. 취향이나 기능의 차이. 역시 또 진실의 문제. 원본과 복사본은 겹치거나 만나면 안 된다는 것. 노동과 수명의 관계. 복제인간의 인권이라는 문제. 그 인권을 위해 원본이 아닌 복제인간 스스로 싸운다는 것. 일종의 또 다른 인권선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