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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03. 2024

11. 가해자의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히가시노 게이고, 《편지》

11. 가해자의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편지》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랜덤하우스

심금을 울리는 첫 번째 질문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차 있는 소설입니다. 물음표를 동원한 직접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등장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 하나하나가 독자에게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이 질문들 하나하나가 심금을 울립니다.

   한 가난하고 착한 청년이 있습니다. 손재주도 없고, 기억력도 좋지 않지만, 체력만은 자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삿짐센터, 가구운송업체, 공사판, 음식점 같은 곳에 일자리를 얻어 주로 몸을 써야 하는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한순간 불상사로 몸이 망가집니다. 험한 노동 현장에서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지요. 그는 이제 능력껏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합니다.

   뿐입니까. 그는 양친도 벌써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십니다. 혈육이라고는 고등학생인 남동생 하나뿐입니다. 그는 이 동생을 매우 사랑합니다. 꼭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일을 못 하니 돈을 벌 수 없고, 돈이 없으니 동생을 대학에 보내지 못하게 생겼습니다.

   동생도 이런 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름대로 일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형은 동생이 ‘걱정 없이 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게 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합니다. 이제 이 청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이 소설이 독자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딱하디딱한 두 번째 질문

   청년은 돈을 훔치기로 작정합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이 또한 전연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이 그랬던 것처럼, 극한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넉넉히 헤아릴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절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몸도 성치 않습니다. 그 정도 사실은 이 딱하고 착한 청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범행에 앞서 곰곰이 궁리합니다. 넉넉한 집에서 훔쳐야 한다, 내 몸이 부실하니 만에 하나 들켜도 붙잡히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청년은 예전에 이삿짐센터 일을 할 때 보아둔 한 부유한 노파가 혼자 사는 집을 고릅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늙어서 기운 없는 노파가 만만하게 여겨지지 않았겠습니까.

   문제는 이 범행 과정에서 청년이 그만 뜻하지 않게 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당장 체포됩니다. 하긴 이토록 어수룩한 범행이 금세 들통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정상참작이 되어 청년은 재판 끝에 사형은 면합니다.

   이제 청년은 감옥에서 하나뿐인 동생 앞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이 ‘편지’인 까닭입니다.

    이 대목만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범행 당사자의 내면 심리나 범행 뒤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소설은 곧바로 동생한테 무게중심을 옮겨놓습니다. 이제부터 동생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렇게 끝까지 갑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살인범의 뒤에 남은 가족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것도 천애 고아 같은 신세로 홀로 남게 된 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이 동생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것이 이 소설이 독자에게 던지는, 딱하디딱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양친을 다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단 하나의 혈육인 형마저 살인범이 되어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 혼자 남은 이 불쌍한 동생에게 주변에서 온정의 손길을 뻗치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동생은 이제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쓴 채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멍에는 편견이기도 하고, 부당한 대우이기도 하고, 왕따이기도 하고, 굴욕이기도 하고, 포기이기도 하고, 좌절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고, 억울함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동생의 처지에서는 참으로 험난한 인생 경험의 목록들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이 목록들로 거의 다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이 동생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보여주는 데 힘을 기울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거나 오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의 독특함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지적해 두었듯이, 이 목록은 그대로 질문의 목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고생담이지만, 그저 고생담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그것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어 독자의 가슴을 시나브로 조금씩 조금씩 저미고 듭니다.

   이 ‘무엇’은 바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몹시 원초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이 어린 영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과 맞서면서 동생은 어렵게,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 나갑니다. 그러니 이 소설은 고스란히 이 동생의 성장담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가 된 인생

   먼저, 동생은 학교를 온전히 다닐 수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당장 형편이 어려워진 탓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선생님들이나 급우들의 눈길이 예전에 견주어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들 동생을 거북해하고 불편해하는 눈치들입니다. 겉으로는 애써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동생은 그것을 다 느낍니다. 어찌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누구는 이 동생에게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티를 내기도 합니다.

   이제 동생은 작은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성실하게 일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어김없이 생깁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인범의 동생임을 알아본 손님들이 있고, 당연히 거기서부터 안 좋은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손님들은 동생을 알게 모르게 불편해합니다. 당장 식당 영업에 지장이 생깁니다. 결국 동생은 식당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동생은 우연한 기회에 밴드의 보컬을 맞게 됩니다. 동생이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밴드의 리더가 권유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동생은 여기에서야말로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고 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하지만 음반 기획사에서 이 동생의 가족관계를 알아내고는 보컬 교체를 요구해 옵니다. 동생은 꿈을 포기합니다.

   연애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지만, 여자 쪽 집에서 이 동생에게 복역 중인 살인범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둘의 교제를 막습니다. 심지어는 여자의 아버지가 돈을 들고 찾아와 무릎을 꿇고 동생한테 자기 딸을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합니다.

   동생은 심한 굴욕을 느낍니다. 결국 동생은 여기서도 물러납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차별은 당연한 것

   참 갸륵한 것은, 그래도 이 동생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형한테서는 끊임없이 편지가 날아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동생은 교도소 인장이 찍혀 있는 형의 편지가 못내 부담스럽습니다. 남들 눈에 띌까 두렵기도 합니다. 실제로 편지 때문에 자기 정체가 알려져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어디에나 그런 약점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편지 때문에 형의 존재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는 편지가 무슨 저주의 낙인처럼도 느껴집니다. 동생은 형과 인연을 끊고 싶어 합니다.

   독자가 동생의 처지에 감정이입이 되어 그가 겪는 모든 사태에서 부당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이 소설은 기다렸다는 듯, 동생이 또다시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 사장의 입을 통해서, 놀랍게도 그 부당함이 부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장이 동생에게 말합니다.

   “차별은 당연한 거야.”

   동생은 어리둥절합니다. 어리둥절한 것은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은 여기서 동생의 입장을 떠나 그 동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제삼자의 생각을 대변하는 구실을 합니다.

   ‘부담을 느낀다면 어느 쪽이 더 심할 것인가? 범죄자의 가족일까? 아니면, 그 가족을 곁에 둔 다른 사람들일까?’

   사장은 말합니다. 범죄자 가족은 차별을 각오해야 한다고요. 범죄자가 교도소에 들어가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고요. 범죄자는 자기 혼자만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요. 그 때문에 범죄자의 가족이 겪는 차별도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의 한 가지라고요.

   물론 이는 연좌제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소설이 일방적으로 사장의 생각이 옳다고 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 소설은 다만 사장의 발언을 통해서 지금까지 동생이 그저 억울하다고만 여겨왔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 깨달음이 참 귀한 것은 이 깨달음을 계기로 이 동생이 처음으로 패해자 가족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는 것이며, 나아가 형의 진심을 마침내 이해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소박하기에 더욱 절실한

   《죄와 벌》에 대면 고민의 차원이 소박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소박하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대목은 결코 섣부른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소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질문할 뿐입니다. 이 질문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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