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May 22. 2024

8. 전쟁 체험, 소년 상실의 아픈 기록

  - 유종호, 《그 겨울 그리고 가을》

8. 전쟁 체험, 소년 상실의 아픈 기록 / 《그 겨울 그리고 가을》 - 유종호 지음, 현대문학사

간접 체험, 증언 듣기

   나라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처지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세대 구분의 기준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6·25 전쟁을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크게 보아서, 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한데 뒤섞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인 셈이지요.

   세월이 더 흐르면 언젠가는 온전히,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세대만이 남게 될 터이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두 세대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 보니, 분단 문제나 그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 시각의 주체가 어느 세대에 속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 곧 전후세대가 전쟁을 겪은 윗세대를, 또는 그 윗세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전쟁에 대한 간접경험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간여행을 통해 그 시대로 돌아가 전쟁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몸으로 직접 겪을 수 없는 한 이는 어쨌거나 ‘간접’ 경험일 수밖에 없을 터이니까요.

   이때 가장 효과적인 간접경험은, 어쨌거나, ‘증언’을 귀 기울여 듣는 것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전후세대가 얻을 수 있는 간접경험은 오로지 증언뿐인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몸소 겪은 당사자의 증언 말입니다.

   물론, 증언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요. 시청각 매체로는 영화나 드라마, 또는 다큐멘터리가 있을 수 있겠고, 문자 매체라면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과 다양한 모양새의 수기류 따위가 여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이 책 《그 겨울 그리고 가을》도 6·25 전쟁 체험기로서 분명한 하나의 증언입니다. 하지만 그저 증언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이 이 책의 남다른 점입니다.   

  

하소연과 되풀이를 넘어서는 증언

   대개의 증언은 하소연의 차원에 머뭅니다. 자신이 전쟁 통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고,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는가를 적당히 과장도 섞어 가며 줄줄이 털어놓는 것―.

   이런 하소연은 차고 넘칩니다. 전쟁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군대에 갔다 온 이야기처럼요.

   물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저 하소연이기만 해서는 그 하소연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세대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 움직이기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요. 자칫 고리타분한 신세타령으로 들리기 십상일 것입니다.

   이런 차원의 세대 간 갈등은 우리한테 낯선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전후세대의 철없는 몰지각을 한탄하고, 전후세대는 전쟁을 겪은 세대의 대책 없이 맹목적인 하소연을, 또 그들의 과도한 걱정과 두려움을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대 간 갈등을 피하려고 증언을 멈춘다면 이는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일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전쟁 체험 세대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는 진리 아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증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일 테지요.

   바로 그렇듯 줄기차게 되풀이해야 하는 증언이기에 그저 무작정의 되풀이여서는 곤란합니다. 이 책은 분명히 전쟁 체험의 증언이되, 무작정의 되풀이가 아니어서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 저의 감상입니다.     


소년 상실의 성장담

   ‘나의 1951년’이 이 책의 부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1951년이라는, 6·25 전쟁의 한가운데 놓인 특정한 한 해의 체험기인 셈입니다.

   한데, 이 책의 저자는 1935년생의 영문학자요 문학평론가입니다. 1951년에 열여섯 살이었다는 뜻입니다.

   열여섯 살이라면 《안네의 일기》를 남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뜬 나이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는 문학에 뜻을 둔 소년다운 눈으로, 혹은 문학적 감수성을 타고난 소년의 눈으로 1951년의 일들을 바라보았다는 뜻이 됩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열여섯 살, 그 어린 시절에 전쟁을 체험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전후세대인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책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짐작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가 이 책에서 낱낱의 사건들을 그저 기록하기보다는, 그 사건들을 겪는 동안 자기 마음속에서 벌어진 일들, 그 내면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형편을 염두에 둔 선택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말에서 그가 이 책의 성격을 ‘자전적 에세이’, ‘회상기’, ‘회상 에세이’ 등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그런 까닭에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쩌면 하나의 성장담일 것입니다. 철모르던 소년이 전쟁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겪으면서 전쟁을 겪기 전과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의 어엿한 철든 어른으로 때 이르게 커가는 이야기―.

   하지만 놀랍게도 저자는 이 체험, 이 성장을 ‘소년 상실’이라고 가차 없이 규정합니다. ‘상실’이라는 말이 가슴을 인정머리 없이 사납게 저미고 듭니다.

   그가 ‘세상은 각박한 곳이지 재미있는 곳이 아니다’라고 야멸치게 선언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체험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가를 넉넉히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춘기에 대한 분노

   물론 개인별로 다양한 편차가 있겠지만, 대개는 지난날을, 그것도 어린 사춘기를 회상하는 사람은 추억에 젖어 그 시절을 아름답게 떠올리기 십상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두뇌가 본능적으로 지난날을 그렇듯 아름다운 색으로 덧칠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집요하리만큼 ‘나쁜’ 기억들만을 불러일으킵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저자의 그런 태도에 설득당하여 속절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전쟁을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을 영원히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생을 통틀어 세상을 편견 없이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단 한 차례의 짧디짧은 시절인 그 사춘기 소년 시절을 바야흐로 그는 전쟁 때문에 허망하게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안타까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거의 분노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비루하고 잔인하고 냉혹하고 비겁하고 저열해질 수 있는가를, 자기 가족에 대한 언급조차 외면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꼼꼼하게, 용서 없이 기록해 보여주려 애쓰는 것도 결국은 이 분노 때문인 셈입니다.

   아니, 그런 체험과 자각이 이 분노의 원천이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가 정색하고 겨냥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는 피란(避亂)의 역경이나 그 구체적인 과정보다는, 학교 다닐 형편이 못 되어 가족과 떨어진 채 어린 나이에 피란지의 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로 푼돈을 벌어 가계를 도와야 했던 그 시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주력합니다. 그 이야기가 이 책의 몸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시절 그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인간 유형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약자, 어린 소년이라는 약자, 이 두 겹의 약자라는 처지에서 겪은 체험이기도 합니다.

   ‘부칠 곳 없는 편지’라는 소제목의 한 에피소드가 가슴을 칩니다.

   어느 날 그의 부친(그는 아버지를 굳이 ‘부친’이라고 호명합니다)이 아들의 안부가 궁금하여 부대로 그를 찾아옵니다.

   부친은 그때 많은 사람이 그랬듯, 억울한 부역 혐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일을 못 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 부친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정상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면 애초 그가 그 어린 나이에 학교에 다니지 않고 낯선 미군들 밑에서 일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나고 그는 자기가 일하고 있던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반닫이 나무 궤에서 남아도는 담요 하나를 꺼내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일해서 모은 새경(그는 품삯을 굳이 머슴의 용어인 ‘새경’이라고 표현합니다)과 함께 그 담요를 부친한테 건네줍니다. 집에 가지고 가서 쓰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아들한테서 담요와 새경을 받아 들고 돌아가는 부친의 뒷모습을 그는 먼눈으로 배웅하며 속으로 이렇게 뇌까립니다.

   ‘부친이 한결 노쇠한 듯 초라해 보여 사춘기 특유의 육친 혐오가 뒤섞인 측은함을 느꼈다.’

   그리고 굳게 다짐하지요.

   ‘저렇게 맥없이 늙어서는 안 된다. 결단코 저리 되어서는 안 된다.’     


상처의 기록

   바로 그때 부대 안에서 평소 한국인 노무자들이 ‘미친개’라고 부르던 한 성질 못된 미군 병사가 잰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미군 병사는 다짜고짜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마구 흔들어 대더니, 그대로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창졸간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미군 병사는 뭐라고 고함을 쳐대더니 그대로 돌아가 버립니다.

   아마 그때는 그런 일이 제법 있었던 듯, 그가 부친에게 담요 건네는 장면을 그 미군 병사는 같은 한국인끼리 무슨 부정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는 그 순간의 자기감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서럽다거나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나 분해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키가 160센티미터에도 못 미치는 열여섯 살 미성년이 장대 같은 미 해병대 일병에게 폭행을 당할 아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 미군 병사의 상급자에게 억울함을 호소라도 해볼 작정으로 장래 영문학자의 솜씨를 있는 대로 발휘하여 영문 편지를 씁니다.

   한데, 그렇게 편지를 쓰는 그를 보고 그보다 나이 많은 같은 한국인 통역은 외려 미군 병사의 역성을 듭니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오해받을 짓을 평소에 많이들 하는 우리가 잘못이라면서요.

   여기서 그는 힘없는 민족의 설움과 동족의 매정함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는 한국인이자 미성년으로, 두 겹의 약자였던 것입니다.

   그 편지는 결국 ‘부칠 곳 없는’ 편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책은 결국 ‘상처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 상처를 더듬어 가는 동안 우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전쟁의 실체를 섬뜩하게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부모 또는 조부모 세대의 상처라는 자각은 참 뼈아픈 것입니다. 이 뼈아픔이 우리 가슴 속에 전쟁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은근한 뜨거움의 잉걸불처럼 가만히 지펴놓습니다.  *

이전 07화 7. 책이 아닌 사람을 위한 도서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