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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15. 2024

6. 시련 속의 인간을 돕는 방법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6. 시련 속의 인간을 돕는 방법 /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우리는 행운아?

   강제수용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있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지금은 강제수용소가 우리 삶의 어떠함을 상징할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엄혹한 시대는 아니지요? 참 다행입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 우리는 행운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사실을 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가르쳐줍니다. 동시에 그런 행운을 타고났으니, 우리는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강제수용소에 대한 학문적 연구서가 아닙니다. 저자는 이 책의 가장 첫머리에서 바로 이 점부터 똑똑히 지적해놓고 시작합니다. 그는 이 책을 ‘객관적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의 기록’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눈길을 끕니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들려주는 강제수용소 안에서의 이야기다.’

   이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저자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 악명 높은 독일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갇혀서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형극의 시간을 보내다가 천신만고 끝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증언

   그렇다고 이 책을 한갓 강제수용소 체험수기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성급한 넘겨짚기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지천으로 널린 그런 하소연 조의 체험담과 이 책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이 제 감상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참경(慘景)을 겪음으로써 새겨 지니게 되는 마음의 깊디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려는 태도, 바로 그것을 저자가 끝까지 지킨 결과로 얻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저자의 직업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신경정신과 교수이자 전문의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할 수 있는 ‘로고테라피 학파’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강제수용소에 있을 때부터 이미 동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를 감행한 바 있습니다. 그저 관찰만 하면서 두 손 놓고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전체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두 번째 챕터를 따로 독립시켜 로고테라피 이론을 설명하는 데 온전히 바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남다른 또 하나의 까닭입니다.     


강제수용소의 정체

   우선 저자는 강제수용소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설명에 힘을 기울입니다. 감옥과 견주어 보면 그 특징이 금세 명확히 드러납니다. ‘감옥에는 있지만 강제수용소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초점입니다.

   두 가지가 핵심이지요.

   하나는 ‘기약(期約)’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는 기약이 있지만,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에게는 기약이 없으니까요.

   사형수나 무기수의 경우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감옥에 갇힌 사람은 어쨌거나 일정한 형기를 마치고 나면 마땅히 출소하게 됩니다. 법이 그것을 보장합니다. 재소자(在所者) 또는 재감자(在監者)는 어쨌거나 그런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는 애초 그런 희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서 나갈 수 있을는지도 미지수지요. 매우 비관적입니다.

   또 하나는 ‘인권’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인권을 누릴 수 있지만,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에게는 그 최소한의 인권조차 없으니까요. 아무리 무자비한 대접을 받아도,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가스실에 끌려가 목숨을 잃게 되어도, 어디다 대고 하소연조차 할 길이 없습니다. 항의나 저항은 더더욱 언감생심입니다.

   하긴 애초부터 그들은 재판절차도 밟지 못한 채 그리로 끌려온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제수용소는 제네바협정이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포로수용소보다도 못합니다. 강제수용소는 한 마디로 ‘인간’이 완벽하게 삭제되고 없는 곳입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악몽 같은 기억은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무려 3년 동안이나 그런 강제수용소에서 살았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에 관한 대목이 가슴을 칩니다.

   기약과 인권이 없는 곳, 그래서 숫제 희망이라는 것이 없는 그런 곳에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가족들은 전부 나치에 처형당해 죽었고, 홀로 남은 자신은 강제수용소에서 완전히 무의미한 목숨을 가까스로 연명해 가고 있는 처지입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아주 위험한 자포자기에 빠집니다. 그 한 가지 실상을 그는 목격합니다.

   어느 날 한 수감자가 자리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기 시작합니다. 먹지도 않습니다. 간청(懇請)이나 주먹질이나 위협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저 하염없이 누워만 있습니다. 배설마저도 그렇게 누운 채로 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몸에서 나온 그 배설물 위에 그냥 누워만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기 포기요, 완전한 환멸입니다. 일종의 자살입니다.

   그런 수감자들을 보면서 그는 결심합니다.

   ‘그들이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니, 살아남도록 도와야 한다.’

   그가 인용하는 니체의 다음과 같이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치료, 자살 방지책

   그는 어떻게든 틈을 찾아내 정신요법과 정신 건강법을 이용한 ‘치료’를 감행합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찾으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동시에 자살 방지책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제수용소에는 자살하려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게 하는 해괴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을 매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고자 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그 목에 달려 있는 줄을 끊는 일조차 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으로 그가 택한 것이 바로 ‘치료’였던 것입니다.

   그의 치료는 곧 죽으려는 사람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들한테 여전히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누구에게는 그것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그의 아이였고, 누구에게는 그것이 책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치료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스스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참 놀라운 치료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치료를 강제수용소 안에 국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강제수용소 이후

   그는 강제수용소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종전을 맞이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강제수용소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는가를 확인하고 나면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잠수부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 깊은 바닷속에서 수면 위로 막 떠오를 때인 것처럼, 강제수용소의 그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갑자기 얻은 자유를 무슨 특권인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강제수용소 안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극심한 비통함과 환멸을 겪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각자 자기 고향에 돌아가 보니, 그 고향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합니다. 하긴 그 고향 사람들도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나름대로 죽을 고생을 한 것입니다. 그래 그런 고향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스스로 이렇듯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은 것일까?’

   남는 것은 비통함과 환멸, 그리고 가없는 슬픔입니다. 그러니, 그런 그들에 대한 치료가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그는 그 치료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정신과 의사도 도와주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희망, 두려워할 것 없음

   하지만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낙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언젠가는 그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모르겠다고 담담히 술회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전언이 가슴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습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神)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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