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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20. 2024

7. 책이 아닌 사람을 위한 도서관

  - 스콧 더글러스, 《쉿, 조용히!》

7. 책이 아닌 사람을 위한 도서관 / 《쉿, 조용히!》 -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부키

직업 또는 하나의 삶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이것은 배우들한테 당신 직업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의 한 가지입니다. 동시에, 제가 그들한테서 가장 부러워하는 점이기도 하지요.

   어쨌거나 대개의 사람이 일평생 겪어볼 수 있는 직업의 세계란 기껏해야 한쪽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몇 가지로 한정되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기회가 주어지고 여건만 허락한다면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해 보고 싶다는 욕망은 좀처럼 지우거나 버리기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이유의 하나도 바로 간접적으로나마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체험하거나 구경해 볼 수 있다는 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더불어 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또 그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훌륭한 방도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직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니까요.     


체험수기, 회고록, 일기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을 포함하여 어떤 책이든 그 내용이 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앞으로도 겪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특정 직업의 세계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우선 관심과 흥미가 쏠립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묘사가 핍진하고, 그렇게 묘사되는 세계가 나한테 낯설면 낯설수록 금상첨화겠지요.

   《쉿, 조용히!》도 이 점에서 독자에게 강렬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라는 친절한 부제가 퍼뜩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애너하임에 있는 한 공공 도서관 사서의 ‘자기 직업 체험수기’입니다. 책 끄트머리의 ‘감사의 말’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성격을 ‘회고록’으로 규정합니다. 저자가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한 회고록인 셈입니다. 책의 성격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잡힙니다. 분명 장점이지요.

   하지만 회고록이라고 해서 저자가 꽤 많이 나이가 든 사람이라거나, 이 책이 깊은 인생철학을 담은 무겁고 진지한 성격의 에세이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얻은 직장인 도서관에서 사서(司書)로 일하면서 몇 해 동안 겪은 일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20대 중후반에서 시작하여 서른 즈음에 끝나는 이야기지요.

   회고록을 꼭 인생의 황혼기에만 쓰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 책은 저자가 사서 생활을 하는 동안 인터넷에 꾸준히 올린 글들의 모음이기도 합니다. 부제의 ‘일기’는 여기에 연유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책은 일반적인 회고록하고는 다르게 매우 솔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어느 한구석 무겁지 않으면서도 곳곳에 소소한 일상의 흥미로움이 파릇파릇하게 살아 있어 읽을 맛이 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차분하고 성실한 관찰의 덕분입니다. 이 관찰이 우리가 도서관과 도서관 사서에 대해서 품고 있던 막연한 고정관념이나 편견 또는 환상을 여지없이 깨트려 줍니다. 이 ‘깨트림’의 쾌감이 감칠맛 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느 책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또 우리가 책을 손에 들 때마다 기대하기도 하는 저 ‘지적 쾌감’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유달리 귀합니다.     


산산이 부서진 기대, 혹은 환상

   도서관이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며, 거기에 있는 책들을 누구나 찾아가 읽을 수 있고, 또 그 책들을 누구나 빌려올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도서관은 언제나 학구적인 열기로 가득 차 있는 지식의 보고이며, 늘 조용하고, 거기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가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며, 거기에서 일을 하는 사서는 누구보다도 책을 잘 알고, 또 책에 깊은 애정을 지닌 사람이겠거니, 하는 생각에도 굳이 토를 달 사람은 없을 테지요.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언제나 책과 책 읽기를 좋아하던 저자는 어느 날 우연히 ‘책을 정리하러 오라’라는 내용의 구인 광고를 보고 해당 도서관에 입사지원서를 내어 일자리를 얻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출근한 첫날부터 저자의 기대는 산산조각 납니다. 아마도 그랬기에 저자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헌정보학이나 도서관학을 전공하지 않은 새내기이니, 우선은 가장 낮은 자리인 도서관 사무 보조로 시작합니다. 물론, 나중에 저자는 사서가 되려면 문헌정보학 석사 학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대학원에 다닙니다.

   한데, 첫 출근 날 저자가 도서관장한테서 대뜸 들은 소리는 맹랑하게도, 컴퓨터 앞에서 자위하는 남자가 눈에 띄면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사서를 찾으라는 난데없는 충고였습니다.

   게다가 저자한테 주어진 첫 업무는 서가에 책을 꽂거나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전단(傳單) 한 다발을 종이 자르는 칼로 잘라 반으로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저자는 고백합니다.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사서가 매혹된 것

   만일 저자가 이쯤에서 세상의 하고많은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 ‘아차, 잘못 왔구나!’ 싶은 마음에 덜컥 사직서를 내고 다른 직업을 구하러 나섰다면, 이 책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계속 그 일을 했으며, 결국 사서의 자리에 올랐고, 마침내 이 책을 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서관이라는 직장에 확고히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저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실망만이 계속되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실망을 뛰어넘는 무언가에 저자가 매혹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무언가’가 이 책의 핵심입니다. 도서관에는 책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별의별 사람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저자의 눈길을 끕니다.

   당연합니다. 도서관은 우선 책이 있는 곳이지만, 그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고, 그곳이 직장인 사람들이 일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도서관을 찾는 것이지요.

   그저 조용히 책을 찾아 읽는 사람들만 도서관에 온다면, 도서관은 적어도 겉으로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도서관처럼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따뜻하게 머물며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한 노숙자들, 집에는 돌봐줄 사람이 없어 슬그머니 기어드는 동네 아이들, 책을 읽는 대가로 나눠주는 무료 햄버거 쿠폰을 받으러 오는 가난한 사람들, 퇴직한 뒤 할 일이 없어 소일하러 마실 오는 어르신들, 마음에 드는 여자 사서에게 작업을 걸려고 오는 남자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것저것 공공정책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놓고 시비를 걸려고 오는 성미 고약한 사람들, 심지어는 마약을 거래하는 장소로 도서관의 화장실을 이용하는 불량배들도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일을 하는 동료 직원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차분한 성격의 학구적인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리라는 기대는 초장부터 접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프리셀 게임만 하고, 누구는 다루기 곤란한 도서관 이용자를 새내기인 저자한테 떠넘기기만 하고, 누구는 제 할 일은 팽개쳐 둔 채 남들 잘못만 헐뜯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누구는 반대로 동료들과는 대화도 거의 없이 오로지 제 할 일만 하다 퇴근 시간이 되면 홀연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다인종 국가인 미국답게 영어에 미숙한 이민자들하고 소통이 잘되지 않아 벌어지는 크고 작은 다양한 사건들까지 겹칩니다.

   이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빚어지는 충돌과 사연들이 과연 이곳이 도서관이 맞나 싶으리만큼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저자의 관심이 어느덧 책에서 사람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무대가 꼭 공공 도서관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모두는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세상의 모든 직장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일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도서관의 공익적 기능을 깨닫는 순간이 눈길을 끕니다.     


책이 아니라 사람

   어느 날 저자는 도서관이 주최하는 대민(對民) 프로그램에 직원으로서 참가하여 아이들을 앉혀놓고 동화책을 낭독해 줄 기회를 얻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고 저자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때처럼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저자가 스스로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전하는 바로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15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듀이 십진 분류법’이라는 것을 개발하여 도서관 체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한 멜빌 듀이라는 사람조차 책을 망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이들이 도서관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군요.

   아마도 거기에서부터 도서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서관이 그저 책을 제공해 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익적 일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

   저자는 사서가 새로운 도서관에 발령받으면, 가장 먼저 그 지역사회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지를 알 수 있고, 그래야 도서관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사서로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여, 다음과 같은 저자의 고백이 가슴을 깊이 울립니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사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할수록 나는 책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 어찌 도서관 사서만의 것이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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