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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27. 2024

9. 60년의 진통이 낳은 음식

  - 오카다 데쓰, 《돈가스의 탄생》

9. 60년의 진통이 낳은 음식 / 《돈가스의 탄생》 - 오카다 데쓰 지음, 정순분 옮김, 뿌리와이파리

양식이냐, 일식이냐, 한식이냐?

   먼저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돈가스’는 양식(洋食)일까요, 일식(日食)일까요, 한식(韓食)일까요?

   아마 한식이 아니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양식과 일식 사이에서는 살짝 망설이다가 답이 반반으로 갈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돈가스는 대체로 넓은 접시에 담아서 나이프와 포크를 써서 먹는 음식이니, 겉보기로는 일단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돈가스는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 ‘경양식’으로 분류되어 당시의 양식집인 일명 ‘레스토랑’의 인기 매뉴였지요. 그러니까 그 시절 돈가스는 분명 양식이었습니다. 일식 돈가스가 널리 퍼진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고요.

   하지만 돈가스는 무엇보다도 그 명칭 자체가 일본말(とんかつ)이며, 분명히 일식집의 주요 메뉴의 하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일식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가스는 양식이기도 하고 일식이기도 하다고 답해야 할까요?

   물론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돈가스를 맛있게 먹고 즐기면 그뿐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어지간히 모순을 안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양식, 일식, 한식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쪽 시각을 기준으로 한 구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식이라고도 양식이라고도 부르는 돈가스를 일본에서는 분명히 양식으로 부르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아마도 일식으로 부를 것입니다.

   하긴 ‘돈가스’라는 말 자체가 서양 음식인 ‘포크커틀릿(pork cutlet)’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표기한 것이라는 사실은 제법 널리 알려진 상식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의 음식점에 가서 포크커틀릿을 주문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돈가스가 나오지 않고, 말 그대로의 포크커틀릿이 나올 것입니다.

   요컨대 포크커틀릿과 돈가스는 서로 다른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돈가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까지 오니, 이것,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요리책이냐, 역사서냐?

   맞습니다. 언뜻 들으면 별것 아닌 듯한 이 단순한 질문에 실은 매우 중요하고도 복잡한 사정과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이 책 《돈가스의 탄생》은 가르쳐줍니다.

   저자 오카다 데쓰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문명개화를 배경으로 한 양식 이야기다’라고 명쾌히 주장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제목에 현혹당하여 이 책을 ‘돈가스 레시피(recipe, 조리법)’로 넘겨짚어서는 곤란하겠지요.

   그러나 저자는 이 만만치 않을 법한 내용을 레시피 이상으로 아기자기하고 재미있게, 또 흥미진진하게 풀어갑니다. 이 책의 장점입니다.

   제목의 ‘탄생’이라는 말이 힌트입니다.

   그러니까 돈가스라는 음식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 이 책의 내용인 셈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튀김옷을 입은 일본 근대사’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곧, 이 책은 일종의 역사서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그대로 대응되는 역사입니다. 이렇듯 역사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이 책에서는 돈가스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어떤 순서로 펼쳐놓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돈가스가 탄생하는 순간은 클라이맥스로서 책의 후반부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가 그 탄생의 순간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 택한 출발점은 놀랍게도 19세기 중후반의 메이지 유신입니다.

   돈가스와 메이지 유신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의문이 독자의 관심을 덜컥 낚아챕니다. 흥미 만점의 미끼인 셈입니다.     


‘요리 유신’과 육식

   일본사에서 메이지 유신이 서양을 모델로 삼아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시도한 개국(開國)과 혁명의 과정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돈가스의 탄생을 위한 실질적인 출발점이기도 하였다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7세기 후반 덴무 천황이 ‘살생(殺生)과 육식(肉食)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한 이래 무려 1200년 동안이나 육식에서 멀어져 있던 일본인들이 메이지 유신의 육식 해금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떳떳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요리 유신’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돈가스는 육식입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일찌감치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쟁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근대화란 결국 서양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아마도 서양인에 견주어 몹시 왜소한 자기네 체형도 극복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일본과 비슷하게 서구 문물을 거의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의 근대화 과정을 밟은 우리 처지에서는 어지간히 헤아릴 수 있을 만한 일입니다.

   어쨌든, 그러자면 당연히 곡식과 생선 위주의 전통적인 식단을 서양인들처럼 육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어야겠다고 판단했을 법합니다.     


식단 바꾸기

   하지만 1200년이나 이어져 온 식단을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이제부터 육식을 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지난한 노력이 시작됩니다.

   이 노력은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정서적인 또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문화적으로 금기였던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려는 노력입니다. 또 하나는, 감각적인 차원에서 아주 실질적으로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고기 음식을 개발하려는 노력이고요.

   서양 것을 받아들여 자기식으로 변형하는 방법으로 소화해 내는 일본인 특유의 솜씨가 발휘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입니다. 우선은 쇠고기부터 시작하고, 나중에 돼지고기로 나아갑니다.

   제일 먼저 천황이 나섭니다.

   일본인들의 정신적·정서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존재인 천황부터 솔선해서 우유와 고기를 가까이하며, 나아가 쇠고기를 먹지 않는 자는 문명인이 아니라는 인식을 널리 퍼뜨립니다. 문명개화가 국가시책인 마당에 백성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의 개화에 큰 구실을 한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명사가 앞장서서 육식론을 설파하기도 합니다. 우리로 치면 새마을운동 같은, 어지간히 관 주도의 생활문화 개혁운동의 느낌이 드는 국면입니다.    

 

입맛에 맞는 음식의 개발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주 실질적으로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고기 음식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육식이 서민들 사이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우선은 감각적으로 고기에 익숙해지는 것이 급선무겠지요.

   그래서 먼저 고기를 서양식 그대로가 아니라, 일본 전통음식의 형태로 조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육식을 하겠다고 다짜고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스테이크부터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지금도 일식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키야키나 우리의 전골 같은 형태의 고기 음식이 등장합니다.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 특유의 저 졸이거나 굽는 방법을 고기 음식에 적용한 셈입니다.

   이때 양념도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간장이나 된장이 쓰인 것은 물론입니다.

   이런 식으로 육식은 일본인의 식단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섭니다.     


빵과 튀김

   하지만 돈가스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단계가 더 필요했습니다.

   하나는 빵이요, 또 하나는 튀김입니다.

   어쨌거나 돈가스는 적당한 두께로 썰어낸 돼지고기에 빵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겨내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침내 돈가스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빵에 익숙해지는 과정과 더불어 기름에 튀기는 조리 방법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먼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덤으로 얻어낸 것이 바로 일본 특유의 단팥빵과 뎀뿌라입니다. 이 또한 이제는 유명한 음식이 되어 있지요?     


드디어 탄생한 돈가스

   여기까지 당도하는 데 걸린 세월이 줄잡아 60년이라는군요.

   육식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금되고 나서 무려 60년이라는,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돈가스가 탄생한 것입니다.

   참 무던히도 노력했다 싶습니다. 그래도 지금 돈가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어 있는가를 생각하면 보람 있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야기를 돈가스에서 끝내지 않고 조금 더 밀고 나아갑니다. 아직 남아 있는 음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카레와 고로케와 라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즐겁고 흥미로운 덤으로 남겨놓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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