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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29. 2024

10. 조선시대 여인들의 숨은 이야기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숙인, 《조선 여성의 일생》

10. 조선시대 여인들의 숨은 이야기 / 《조선 여성의 일생》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이숙인 책임기획, 글항아리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

   현모(賢母), 양처(良妻), 열녀(烈女), 효부(孝婦)……. 퍽이나 귀에 익은 말들이지요? 귀에 익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는 누군가, 또는 어디선가 이 말들을 자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강조한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이 책을 처음 손에 쥐고 저는 문득 지금껏 한 번도 진지하게 품어본 적이 없던 이런 의문에 덜컥 사로잡혔습니다.

   여기저기 자료조사를 해보면, 이 말들은 그 역사적 기원이 제법 확실합니다.

   ‘현모양처’는 일제 강점기에 한창 근대화 과정을 밟고 있던 일본에서 건너온 개념이고, ‘열녀효부’는 유교 성리학이 국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시대의 개념입니다. 각기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이상적인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개념들인 셈입니다.

   예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가운데 〈동이〉라는 사극이 있었지요?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듯한데요. 조선 숙종 임금 시기가 배경으로, 뒷날 영조 임금의 어머니가 되는 동이라는 여인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배우 한효주 님이 동이역을 연기했고요.

   독특한 것은, 그 드라마에서 그리고 있는 동이라는 여인은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열녀효부’의 개념보다는 우리 근대화 과정에 걸맞은 여성상으로 강조되었던 ‘현모양처’의 개념에 더 가까운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조선시대가 배경이기에 이 점이 시청자들한테는, 고증의 정확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꽤나 새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법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강조했던 이상적인 여성상은 ‘현모양처’가 아니라 ‘열녀효부’였습니다.    

 

이상적인 여성상이라는 개념

   그렇다면 21세기인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은 어떤 것일까요?

   아니, 이 질문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시대가 요구하는 특정한 여성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성상을 요구하는 일 자체가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기실 이런 요구를 하는 쪽은 흔히 여성이 아니라 남성 쪽입니다. 여기에 여성 자신의 뜻이나 의지는 삭제되어 있기 십상입니다. 어떤 시대에서든, 여성 스스로 그런 여성상을 이상적이라 여기고 순순히, 또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열녀, 효부, 현모, 양처와 같은, 어찌 보면 너무도 옳고 당연해서 그 누구도 감히 시비를 걸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일련의 개념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 개념들은 혹 강요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뭇 여성들을 억압하는 구실을 하지는 않았을까요?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문들에서 출발하며, 시종일관 줄기차게 이런 의문들을 제기함으로써 우리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산산이 부수어 줍니다.     


조선 여성의 삶에 대한 재조명

   조선시대 여성이라고 하면 여러분 머릿속에는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마 누구라도 신사임당, 황진이, 논개, 장희빈, 허난설헌 정도를 두서없이 얼른 떠올리지 않을까요. 여기에 허구적인 인물로는 춘향이나 심청이를 덧붙일 수 있겠고, 신윤복의 풍속화 속에 나오는 저 아름답고 도발적인 여인들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이 책은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런 여성상들 하나하나의 숨겨진 이면을 역사적인 자료들을 꼼꼼히 참조하여 낱낱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우리가(또는 남성들이) 몰랐거나 무시했던 조선 여성의 삶과 정체에 대한 재조명이자, 새로운 규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머리글에서 이를 가리켜 ‘조선 여성들의 왜곡되고 주름진 시간을 펴는 일’이라고 꽤나 멋스럽게 규정합니다.     


열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각

   책의 체제가 재미있습니다.

   이 책은 열세 명의 한국학 각 분야의 전문가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특별강좌에서 ‘조선 여성의 일생’에 대하여 각기 다른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세 편의 글은 조선 여성을 바라보는 열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각이기도 합니다.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제1부인 1장부터 6장까지는 ‘조선 여성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바로 잡는 내용입니다.

   제2부인 7장부터 13장까지는 ‘조선 여성, 그 삶의 현장’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 여성들의 일상생활을 미시적인 차원에서 알뜰하게 살펴보는 내용입니다.

   이렇듯 열세 명의 필자가 보여주는 열세 가지의 다양한 시각과 문체는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하며, 적재적소에 배치된 많은 컬러판 자료사진은 책의 내용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적절히 돕는 구실을 합니다.     


신사임당 재조명

   제1부에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신사임당에 대한 재조명입니다.

   5만 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우리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여인이자, 그 역시 5천 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인 율곡 이이를 낳고 키워낸 훌륭한 어머니의 대명사인 신사임당―.

   필자는 그 신사임당에 대한 오늘날의 이런 평가가 5백 년(신사임당은 1504년 생입니다)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정한 변화를 겪은 결과라고 말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화가였습니다. 물론 직업적인 화가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높은 수준의 그림들을 남겨놓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실제로 당시 신사임당이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알려진 것은 산수도를 잘 그리는 화가로서였습니다. 수많은 선비가 신사임당의 그림과 관련하여 지은 글들이 자료로서 남아 이를 입증해 줍니다.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는 것이 신사임당에 대한 당시 세간의 평가였습니다.

   신사임당이 살아 있을 당시, 그러니까 16세기의 신사임당은 훌륭한 어머니가 아니라, ‘그림 잘 그리는 여인 신씨’였던 것입니다.

   이 평가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신사임당 사후 백여 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에 와서입니다.

   우암 송시열이 그 주도자입니다. 그는 신사임당의 그림에 붙인 발문(跋文)의 끄트머리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정통 유학자 송시열은 사임당의 그림을 ‘율곡의 존재를 더욱 특별하게 해주는 보조물’ 정도로 평가한 셈입니다.

   이때부터 신사임당은 화가로서보다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노론 계열의 인사들이 이 평가를 더욱 단단하게 다집니다. 심지어 율곡의 인물됨을 사임당의 태교와 연관 짓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훌륭한 어머니 사임당의 신화라는 것입니다.     


황진이 재조명

   황진이에 대한 재조명도 흥미롭습니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몇 편의 시조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몇몇 일화들은 황진이를 기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술가라고 여기도록 만듭니다.

   또, 임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을 담은 시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황진이는 그야말로 애절한 로맨스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당시 보통 기생들의 삶을 살펴볼 때 이들 시조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당시 기생들은 관리들의 잔치에 불려 나가 의무적으로 애정 시편들을 지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황진이의 시조들도 공개된 장소에서 기예를 뽐내는 차원에서 노래로 지어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진이의 애정 시편들에 담긴 감정은 황진이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고객인 남성 손님들의 취향과 욕구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선 여성의 일상생활

   제2부에서는 온갖 사회적인 편견과 규제 속에서 여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어떤 고충에 시달렸는지, 또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 그들 나름대로 은밀히 삶을 즐겼는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보여줍니다.

   유교 성리학에 입각한 ‘삼종지도’나 《삼강행실도》로 대변되는 여성의 행동거지와 품행에 대한 규제가 조선 여성들의 삶을 음으로 양으로 억압했다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조선 여성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 년 내내 숨 돌릴 틈 없는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 여성들이 나름대로 삶을 견디고 즐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몹시 흥미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프게 가슴을 저며옵니다.

   규방에서 끼리끼리 어울려서 하는 자수, 화전놀이나 투호 같은 소일거리들, 돌아가면서 시를 짓는 시회(詩會), 한글로 글쓰기와 소설 읽기, 숭유억불이 국가시책이던 시절의 불교 수행 따위가 모두 그 일환입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 그리고 남성

   이 책을 통하여 독자는 그동안 ‘열녀효부’나 ‘현모양처’ 같은 이미지로만 알아 왔던 조선 여성의 삶, 그 진면목을 마주하게 됩니다. 곧, 지금까지 아예 몰랐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조선 여성들의 감추어진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지요.

   나아가, 독자인 우리는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에서 세상의 절반인 여성과 세상의 나머지 절반인 남성이 서로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속절없이 스스로한테 던져보게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의미는 넉넉하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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