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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05. 2024

12. 성령의 터치, 영혼의 순례

  – 서영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12. 성령의 터치, 영혼의 순례 /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지음, 문학동네

느닷없이 순례길에 오른 소설가

   나이 예순을 훌쩍 넘긴 한 여인이 어느 날 문득 모든 일을 중단한 다음 20대 젊은이들처럼 배낭 하나 짊어지고 장장 40일 동안 무려 800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릅니다.

   그는 일찍이 〈먼 그대〉라는 참 아름답고 가슴 저미는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소설가 서영은입니다. 무슨 일일까요?

   여러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하며, 후학도 기르고, 못 다 쓴 작품도 마저 써서 우리 한국 문단에 여러 가지로 필요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중요한 이바지를 하는, 그래서 매우 넉넉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 그가 무엇 때문에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산티아고로 보낸 것일까요? 궁금합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순례의 온 과정에 대한 성실하고 진지한 기록입니다. 소설가의 손끝에서 나온 믿을 만한 문장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합니다.     


여행과 관광

   여행과 관광은 다릅니다. 여행은 체험이지만, 관광은 구경이니까요. 여행과 관광 사이에 놓인 거리는 체험과 구경 사이에 놓인 거리만큼이나 멉니다.

   여행객과 관광객의 차이, 여행이 남기는 것과 관광이 남기는 것, 여행으로 얻는 것과 관광으로 얻는 것―. 같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체험과 구경―.

   체험은 그 무언가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 안으로 그 무언가를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경은 겉에 머물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체험이 만남이라면, 관광은 그저 힐끗거림, 일별입니다.

   그러니 소통은 관광보다는 체험에 더 가까운, 또는, 체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현상일 것입니다.

   체험의 결과와 구경의 결과가 서로 다른 것은 여행객의 마음가짐과 관광객의 마음가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사람과 관광을 다녀온 사람의 차이―.     

   (물론, 저는 지금 관광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관광에는 마땅히 관광 나름의 가치와 효용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그것대로 존중받을 만하다는 데 저는 넉넉히 동의합니다. 다만, 이곳이 관광보다는 여행을 ‘더’ 이야기하려는 자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여행객과 관광객

   여행객은 자신을 열어놓고 자신을 내놓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 그것은 위험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걸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감히 여행을 떠날 수 없습니다.

   관광객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뜻도 없습니다. 안전합니다. 동선이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알베르 카뮈가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공포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정곡을 찌른 셈입니다. 참 마음에 드는 규정입니다.

   그래서 이어 카뮈가 ‘여행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이끌어 간다’라고 덧붙이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험’하는 동안 여행객은 저도 모르는 새 스스로 변화합니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 자기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여행을 떠나기 전과 달라져 있다는 것을 여행객은 스스로 깨닫습니다. 깊고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이 변화가 여행을 관광과 다르게 만듭니다. 여행은 그런 것입니다.     


순례와 여행

   그렇다면 순례는 어떨까요?

   순례는 관광보다는 여행 쪽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아니,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저는 순례가 여행보다 훨씬 더 ‘여행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여행의 극한치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순례는 여행으로 할 수 있는 체험의 극한 아닐까요.

   물론 체험 자체의 극한은 숫제 거기에 눌러앉아 사는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여행객은, 순례객은 어쨌거나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와야 여행이요 순례입니다.

   그러니까 ‘돌아오기 위해서 여행한다’라는 말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하지만 여행에서, 그리고 순례에서 돌아온 사람은 이미 떠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누가 어떤 책을 진심으로 깊이 읽고 나면 그는 그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겠지요.

   곧,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기 위하여 여행을, 순례를 떠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여행의, 순례의 진짜 목적지는 자기 자신인 셈입니다.

   이것이 여행의, 순례의 본질일 것입니다.     


변화에 대한 갈망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라는 이 단순하고 멋진 제목의 책에 붙어 있는 부제가 ‘산티아고 여행기’가 아니고 ‘산티아고 순례기’인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여행기가 아닌 순례기, 여행의 극한, 극한의 마음가짐―.

   저자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러니, 교통편이나 숙소는 어떻고, 어디서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무슨 볼거리가 있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하여 주는 실용적인 여행 지침서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펴든 사람은 적잖이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자와 같은 마음가짐, 뭔가 스스로 변화하고 싶은 내면의 깊은 갈망이 있는 독자에게는 이 책이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좀 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저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제 속에도 저자와 같은 깊은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만난 것은 제게는 하나의 작은 행운입니다.

   이 글은 그 고백입니다.


순례의 시작

   저자는 말합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산티아고에 다녀온 사람들이 쓴 책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다고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처럼 ‘그저’ 다녀오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라는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그 다른 사람들도 다 나름의 진지한 마음가짐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려는 표현일 뿐입니다.) 저는 저자의 말이 참 믿음직스럽습니다. 이 책이 빤한 여행기가 아니라는 뜻이니까요. 세상에 빤한 책을 읽는 것만큼 지루하고 곤혹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이 순례길에 나서기까지의 사연을 털어놓는 데 무려 80쪽이 넘는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88쪽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 앞부분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자는 모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한 문학상 심사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곤혹스러운 경험을 합니다.

   자신이 당선작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작품이 젊은 심사위원들한테서 혹평을 받은 것입니다. 또, 같은 연배의 다른 심사위원에게서는 노회한 권위주의의 냄새를 맡습니다.

   이때 저자는 작가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떠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애초 자신의 문학이 있을 자리를 생각할 때 늘 염두에 두었던 고흐의 그림 〈구두〉를 떠올립니다. 이 ‘구두’의 성격을 그는 ‘삶의 부조리를 끝까지 대면해온, 다 해진 구두’라고 규정합니다.

   이어 한가롭게 문학상 심사위원이나 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허상을 추구해온 결과였다고 아프게 고백합니다. 그가 스스로 진정한 자신을 잃고 있었다고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이 자각은 동시에 순례에 대한 갈망의 자각이기도 합니다. 카뮈가 말한 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이끌어가는 여행’, 그 순례는 이 순간 사실상 시작된 셈입니다.     


엄정한 기록

   그런 만만치 않은 동기에서 떠난 순례길인 만큼 저자는 순례의 구체적인 낱낱의 국면뿐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내면의 풍경까지도 모두 무서우리만치 솔직하게 기록하고 묘사합니다.

   순례의 서론이 단편이라면 순례의 본론은 장편입니다. 한 편의 소설처럼 기승전결이 있고, 갈등 구조가 오롯이 살아 있습니다.

   저자가 ‘치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단 한 사람의 순례길 동료가 이 갈등 구조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저자와는 당연히 다른 동기로 순례길에 나선 만큼 둘 사이의 갈등은 어쩌면 필연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갈등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걸 축소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며,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저자는 엄정한 태도를 끝까지 지킵니다. 날마다 메모하고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이 글을 썼으며, 이 책에 허구적인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저자의 말이 오롯합니다.     


영혼의 순례

   그렇다 하더라도, 애초의 목적 그대로 여행이 무탈하게 끝났다면 그가 굳이 4백 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쓸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날마다 걷고 또 걷고, 낯선 곳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동행과 이런저런 소소한 충돌을 겪고, 순례길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런저런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교회와 수도원을 거듭 방문하고, 곳곳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동안 그의 가슴 속에는 놀랍게도 신앙의 불꽃이 가만히 피어오릅니다.

   여기서부터 이 순례는 그대로 영혼의 순례가 됩니다. 신의 섭리가 언제나 그렇듯 이는 준비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성령의 터치

   바다가 보이는 곳 언덕에서 저자가 우연히 한 마리 나귀를 만나 마침내 갈망하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앞으로 두 번 다시 표적을 구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다짐하는 장면은 그대로 한 편의 아름다운 간증입니다.

   순례에서 돌아온 그는 이를 두고 ‘성령의 터치’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내 인생에 허무는 없다’라고 떳떳하게 선언합니다.

   독자 처지에서 이것은 그대로 책 읽기의 기적에 해당합니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실제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면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깊은 신앙고백의 현장에 당도해 있는 자신을 문득 깨닫고 소스라칩니다.

   이 소스라침이 참 귀하고 소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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