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구마
세계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모든 국가가 기근을 겪었다.
특히나 전쟁 직후의 기근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 사람들에게 기근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식재료가 두 가지 있었는데, 바로 감자와 고구마이다.
감자와 고구마 모두 남미에서 시작된 작물이며 콜럼버스와 그의 일행들이 미대륙을 탐험할 적 유럽으로 전해졌다.
신기하게도 유럽의 땅에서 감자는 너무나 잘 자랐지만 고구마는 감자와 달리 그 땅에 낯을 가렸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던 시절 그들은 부족한 식량 메우기 위해 고구마를 필리핀으로 가져가 심어보았고 그 결과는 예상과 달리 매우 좋았다.
필리핀을 시작으로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전역에 고구마 종자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감자가 배고픈 사람들이 배를 달랬고, 같은 시기 아시아에서는 고구마가 많은 사람들의 굶주린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한반도의 고구마 유입은 당시 한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지고 들어와 부산에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高 높을 고
貴 귀할 귀
爲 할 위
麻 삼 마
흉년이 들어도 키워 먹을 수 있는 귀한 마
따뜻한 온도만 있으면 매 마른땅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는 조선 땅에서 잘 자랐지만 보관이 어려웠고, 특히 유입 당시 월동 방법을 몰라 고구마가 많이 얼어 죽어 전국적인 보급이 쉽지만은 않았다.
농산물을 연구하던 조선의 실학자들은 여러 실패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위해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덕에 조선 농민들이 손쉽게 고구마를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수확되는 대부분의 고구마는 속이 노랗고 포슬포슬한 식감을 갖고 있다. 호박 풍미를 갖고 있는 고구마는 호박 고구마, 밤의 풍미를 갖고 있는 고구마는 밤 고구마라 부른다. 개중에 물컹하고 아무런 풍기 없는 흙 비린내와 함께 질퍽하고 맛없는 고구마들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미 대륙(북미 , 남미)에서 생산되는 원래의 고구마는 크기도 엄청 크고 주황색 빛을 띠며 식감이 매우 질퍽하고 당근과 비슷한 풍미를 갖고 있다.
한국인들은 고구마 자체의 단맛과 풍미를 즐기기 위해 다른 양념이나 복잡한 요리 과정 없이 삶거나, 찌거나, 구워서도 충분히 즐기는 식문화가 있다.
하지만 미대륙 사람들은 흔히들 고구마에 각종 양념을 넣고 요리해 먹는다.
실제로 난 20대 초반 유학하던 시절에 고구마가 너무 먹고 싶어 대형 마트에 갔는데 성인 남자 팔뚝만 한 크기에 '이게 맞나?' 의심하며 구매했었는데, 집에 와 오븐에 빠짝 구웠는데 너무 맛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었다.
일 년 동안 수셰프로 일했던 뉴욕 wall 가 근처에 위치한 레스토랑 Manhatta를 떠나 나는 ilis라는 레스토랑에 파티셰로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오너 셰프 Mads는 내가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의 요리 철학을 귀 말고 눈과 코와 입으로 느꼈으면 좋겠다며 채용 당일에 저녁을 초대해 주셨다.
그리고 그날 셰프님께서 대접해 주신 요리 중 하나가 사진 속 요리,
'Sweet potato and caviar'이다.
셰프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엄청 맛있게 먹은 요리는 아니었다.
아마 그날 배 터질 정도로 먹었던 메뉴 중에 가장 별로였다.
하지만 책의 본질로 들어가 이 책은 맛집 추천서가 아니라는 것.
먹는 예술을 글로 쓰는 작가로서 이 요리는 꼭 글에 남기고 싶었다.
먼저 한국인에게 익숙한 노랗고 밤의 풍미가 있는 고구마를 녹은 밀랍 안에 넣고 오븐에서 장 시간 익힌 후, 케모마일 꽃을 넣어 접시 모양으로 밀랍을 굳혔다. 그리고 손님 테이블에서 커팅을 해준 후 그 위에 캐비어를 올리고 직접 짠 헤이즐넛 오일로 마무리 한 요리다.
정말 별거 없고 간단한 과정이다.
하지만 셰프님의 철학을 이해하고 이 요리를 바라본다면 말은 달라진다.
별거 없고 간단한 요리 과정이 사실은 자연의 형태 그대로를 접시에 담았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가?
고구마에서는 밀랍의 향과 케모마일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캐비어에서는 고소하고 녹진한 소고기를 버터에 시어링 한 그 기름 맛이 났다.
달달한 고구마 위 캐비어의 짭짤함은 고구마에 김치를 먹는 한국인의 식문화를 서양화 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올라오는 헤이즐넛 오일의 향은 이 모든 재료의 합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맞다.
나는 이 요리를 먹으며 눈이 커지지도 않았고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나오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한 중년 요리사의 철학을 아무런 설명 없이 오로지 그의 요리로 읽어낼 수 있었다.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주는 고구마.
그래도 나름 따뜻한 곳에서 더 예쁘고 맛있게 자라주는 새침데기 같은 작물이다.
어딜 가던 구하기 쉬운 이 못생긴 고구마에게는 굶주리던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준 역사가 있고,
옛 선조들의 가르침도 깊숙이 베여있다.
이야기가 담긴 식재료는 가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빛이 난다는 것.
나는 매년 가을이 너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