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토마토와 매실
22살, 요리의 '요'자도 모르던 나는 요식업 경영을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뉴욕 명문 요리학교 CIA에 입학했다.
경영에 무슨 요리학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분야를 잘 아는 경영인이 되고 싶었다.
조리보다는 제과제빵에 관심이 많았고, 그렇게 난 CIA 제과제빵 전공으로 입학을 결정했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CIA는 실습수업 때마다 교수님들에게 평가를 받는데, 입학 첫날 내 점수는 전체 꼴등이었다.
살면서 꼴등이라는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던지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난 단 한 번도 공부와 실기 연습 모두 소홀하게 한 적이 없었다. 동기들이 모여 술을 마실 때도 나는 실기 연습실에서 연습을 밤낮으로 했다.
다른 학생들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마다 한국을 들어갈 때, 나는 방학을 인턴쉽 기간에 추가하여 3개월짜리 인턴쉽을 6개월로 연장해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졸업 전에는 학교 대표로 뉴욕 주 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수상했고, 이탈리아 발사믹 협회에서 계최한 대회에서 1등을 해 졸업 직후 학교 대표로 이탈리아도 다녀올 수 있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나의 유학생활을 후회 가득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고 잘 해내고 싶었던 20대 초반의 열정과 발악은 나에게 지치고 힘들 틈을 주지 않았었다.
졸업하고 나니 취직이 잘 되었다.
학교 다닐 시절 'Hospitality' 경영 수업을 들을 때 지침서로 썼던 자서전이 한 권 있었다.
Shake Shack 버거의 창업자 Danny Meyer라는 요식업 경영인이 쓴 책, 'Setting the table'이다.
그분의 경영 철학은 내가 요식업 경영인이 되고자 했던 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의 회사 소속 'Manhatta'라는 레스토랑에 입사하게 되었다.
꼬미 요리사로 입사한 지 1개월 만에 수셰프로 승진했다.
수셰프가 되던 그 순간 나는 내 목표를 잠시 잊고 파티셰로서 일에 미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가 없었다.
덥고 덥고 또 더운 뉴욕에서의 8월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덥다.
출근하려 지하철을 타기만 했다 하면 푹푹 찌는 열기와 지하의 습함이 사람 참 미치게 한다.
24살, 평범했지만 끔찍이도 바빴던 나의 일상에 재미있는 오퍼가 하나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지선 씨, 제 이름은 남 OO입니다. 저희 회사가 10주년을 맞이해서 행사를 하게 되었어요. 평범한 케이터링 말고 조금 특별한 선물을 직원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와중에 지인을 통해 지선 씨의 연락처를 받게 되었어요. 조심스럽게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행사는 이번달 마지막 주 토요일인데, 혹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연락을 보자마자 바로 답장을 했다.
네, 감사합니다!
컨셉은 내가 정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10명의 임원들만 초대한 행사라 솔직히 부담이 없었다.
사실 정말 기본적인 케이터링 행사용 작은 디저트를 해도 문제없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또 나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 끝에 내가 결정한 컨셉은 '디저트 테이스팅'.
4계절을 코스로 짜면 어떨까? 재미있을 것 같았다.
봄이나 가을에 나오는 과일들은 대부분 하우스 재배가 가능해 요즘은 사시사철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4계절을 컨셉으로 잡고 테이스팅 메뉴를 짜기엔 여름만 한 계절이 또 없었다.
두 번째 여름을 도두보다 목차에서 다룰 먹는 예술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바쁜 것 같다며 착각하며 살던 어린 24살의 내가 소중한 마음으로 손님들에게 선물한 여름이다.
그 해 5월 나는 레스토랑 여름 디저트 메뉴개발을 위해 매실로 청을 담가뒀었는데 결국 못쓰고 방치했었다.
담근 지 100일 좀 되지 않은 매실청이어서 달달하지만 신맛이 잘 도는 그런 상태의 청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매실 주스만큼 반가운 과일 주스가 또 있을까?
나는 방치해 둔 소중한 매실액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매실청과 잘 어울릴 만한 싱그러운 제철 재료를 생각했다.
너무나도 당연하듯이 토마토가 생각이 났다.
7월-9월이 제철인 채소, 토마토는 더운 여름에 땄을 때가 가장 싱그럽고 달다.
토마토가 채소라고 불리는 게 의아할 정도로 여름 토마토는 정말 달다.
여름만 되면 유난히 더 찾게 되는 아이스깨끼, 빙수, 아이스크림. 어릴 적 여름마다 꼭 찾아 사 먹던 토마토맛 쭈쭈바가 생각이 났고 그렇게 토마토를 활용해 그라니타를 만들게 되었다.
그라니타는 이탈리아의 전통 디저트이다.
과일을 갈거나 주스를 내어 넓은 그릇에 담아 냉동실에 넣은 후 포크로 갈아 만든 이탈리아식 빙수를 그라니타라고 부른다.
토마토는 살짝 데쳐 껍질을 벗기고 꿀과 함께 믹서기에 넣고 블랜딩 했다.
입에서 사르르 녹아 깔끔한 식감을 주면 좋겠다는 마음에 껍질은 사용하지 않았고 냉동하기 전에 채에 한번 걸러주었다.
매실액은 달리 요리하지 않았다.
100일의 숙성기간은 요리사의 손길 없이 오로지 자연의 재료와 온도 그리고 바람으로 숙성되었기 때문에 따로 요리의 과정을 추가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맛있었다.
싱그러운 토마토 그라니타와 자연이 요리해 준 매실액의 톡톡 튀는 상큼함에 시소 잎과 연유를 블랜딩해 시소 소스를 만들어 올림으로서 마지막에 고급스러움과 조화로움의 터치를 줄 수 있었다.
레스토랑의 이름 없이 진행한 행사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시식도 혼자 해봐야했고 보완해야할 점도 스스로 찾아야했다.
정말 그 어느때 보다 더 많이 먹어보고 더 많이 버려봤던 이 경험은 요리 뿐 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성장하는데 있어 넓고 단단한 힘이 되어주었다.
낮에는 매미가 밤에는 귀뚜라미가 울던 8월의 스물넷,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함 대신 소중한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라고 바라볼 때 내가 더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