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이야기 - 일곱
나는 그래서 자신의 가치관과 도덕적 신념을 분명히 정립하고 가급적 그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타인의 명령이나 사회적 압력에 무방비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과 신념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의견도 당당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해야만 한다.
Milgram experiment, 즉 밀그램의 실험은 권위에 대한 복종과 관련된 실험으로 평범한 인간이 권위에 복종해 얼마나 잔혹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961년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스탠리 밀그램 교수(Stanley Milgram)가 실험한 것으로 '권위적인 불법적 지시'에 다수가 항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몇 몇 학자는 이 실험이 약간 연출된 부분도 있다고도 하고 밀그램 본인도 이 연구의 방법론적 취약성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결과는 우리에게 꽤 강한 교훈을 시사한다.
그는 이 실험을 단순한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이라고 실험 참여자를 속였다. 피실험자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고,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에게 가짜 전기 충격장치를 달았고 교사에겐 그 사실을 속이고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가하게 했다. 그리고 실험대상인 교사에게는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수 있도록 허용됐다. 그는 실험 전에는 실험 대상자의 0.1%만이 450볼트까지 올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완전히 예상을 벗어났다. 무려 65%가 450볼트까지 올렸던 것이다. 그정도로 전압을 올리면 상대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실제로 날카로운 비명 소리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은 연구원이 지겠다는 말에 단순하고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갈때까지 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인간의 권위에 대한 취약성이 여실히 들어난 것이다.
여러 책에서도 언급된 내용이지만, 밀그램의 실험을 근거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나치가 포로들을 대량 학살할 때에도 거리낌은 물론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명령에 복종하여 실행'을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설명이 되고는 한다. 그 이후의 현대전에서도 포로를 학살하고 고문한 자들도 나중에 자신들이 기소가 되었을 때에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대답으로 자신의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당화했다. 어쩌면 그들도 '권위적인 불법적 지시'에 항거하지 못한 다수에 속할 뿐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그들의 유죄와 무죄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보통 사람의 과반수 이상은 그러한 '권위적인 불법적 지시'에 항거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부당하고 잔혹한 '짓'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은 그런 인간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다.
'권위에서 나오는 불법적 혹은 잔혹한 지시'는 전쟁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여러가지 면에서 삶은 전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인지 우리가 평소에 삶을 살아가며 접하는 많은 관계 속에서 그러한 일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부분의 명령과 지시가 이루어지는 곳은 평범한 사람들이 다니는 직장이며 따라서 그 속에서 밀그램의 실험과 같은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피실험자중 '전기 고문을 당하는 피해자'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사원들은 그래서 자주 합법으로 위장된 완벽한 불법 혹은 부당하고 가혹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회사나 조직에서 발견되는 밀그램의 실험과 유사한 상황은 실제 밀그램의 실험과 크게 다른점이 있다. 실제 밀그램의 실험에서는 피실험자인 학생역할을 하는 사람에겐 진짜로 전기고문이 시행된 것이 아니다. 그저 전기 충격을 받는 척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회사나 조직에서 밀그램의 실험과 유사한 행태가 벌어질 때 피실험자의 대상이 되는 평범한 조직원은 진짜로 충격을 받게 된다. 전기의 형태는 아니지만 언어 폭력, 과도한 노동, 정신적 압박 그리고 심하면 가혹한 가스라이팅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자신이 회사 생활을 적어도 10년 이상을 했다면 그 10년의 시간을 되돌아 보기 바란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도 다시 살펴보길 바란다. 물론 직장 생활을 10년이 아니라 1~2년만 했어도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꽤 될 것이다. 아무튼 비록 450볼트의 전압을 거는 것과 같이 참혹하고 가혹하게 직접적으로 타인을 위태롭게 했거나 혹은 본인이 그런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위협을 꾸준히 했거나 혹은 받았을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은 15볼트에서 시작해서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린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사소한 '불법적 혹은 잔혹한 지시'에서 매우 가혹한 '불법적 혹은 잔혹한 지시'까지 상당히 폭이 넓은 처벌을 가했다. 사실 조직에서도 거의 같은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단지 당신의 의자가 전기 고문 의자가 아닐 뿐이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겪었을 법한 '불법적 지시 혹은 피해'는 무엇이 있을까? 참혹한 다른 사례도 있지만 그나마 외견상 덜 참혹한 사례를 들어 보도록 하겠다. 일단 제공한 노동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가장 간단한 예로는 법적으로 혹은 사규에 따라서 정해진 휴가를 보장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일반 사기업에서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급하게 고객이 원한다는 이유로, 등 등 수많은 이유로 보통의 직장인들 중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정당하게 부여된 휴가를 사용하지 못하고 박탈당한다. 그냥 기록상으로 쓴 것으로 처리하고 허공으로 휴가를 날려버린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휴가를 그런 식으로 날린다는 말인가? 우리 회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라고 말이다. 이런 경우라면 진심으로 축하한다. 보수나 다른 측면에서 특별히 문제가 없다면 그 회사에 계속 다니길 바란다. 당신은 운이 좋은 것이다.
아무튼 이것은 매년 상당한 금전적 보상을 착취 혹은 갈취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심지어 어린 여사원이 쓰고 싶어도 여러 이유로 불가피하게 쓰지 못한 휴가를 보상하지 않고 비열하게 갈취하는 사람을 직접 본적도 있다. 정당한 휴가 보상금을 그 사원에게만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권위에서 나오는 불법적이고 잔혹한 지시'에 항거하지 못하고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런 짓을 해도 그자는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해당 사원으로부터 결코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그녀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훈계까지 했다. 왜 그 권리를 박탈 당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말도 안되는 논리를 세워서 몰아 세웠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젊은 여사원은 항거할 수가 없었고 단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꽤 큰 정당한 보수를 빼앗긴 것과 다를바 없기 때문에 아마도 150볼트 정도 전압의 세기로 고통받은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실제로 그로 인하여 꽤 오랜 기간 동안 강한 무력감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더 높은 강도의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 정당한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박탈한 그 '행위자'는 본질적으로 권위자의 명령에 따라서 고문을 자행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같은 행위를 한 것이다. 당신이 만약 이런 유형의 피해자라면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가해자라면 이제라도 뒤를 돌아다 보고 맹목적으로 권위에만 복종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한 그자가 비록 권위에 굴복했다고 하여도 그자는 피해자로부터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Self deception, 즉 자기 기만은 사실과 다르거나 진실이 아닌 것을 합리화하면서 사실 혹은 진실로서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자기 기만을 하는 사람은 그와 반대되는 증거가 충분히 있는 일에 대하여도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합리화하고 믿고자 한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높은 강도로 고문을 자행한 사람들은 자기 기만을 특히 잘하는 사람이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하는 것이 본인의 입장에서는 따라야만 할 당면한 사실이고 따라서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의 판단과 행위를 합리화 하는 것이다. '지시가 그렇게 내려왔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 라는 말이라도 하면서 미안해 하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약간이라도 양심적인 자기 기만자이다. 실제로는 이런 양심적인 자기 기만자도 드물다. 대부분은 자신의 행동을 방어하고 합리화 하기에만 급급하다.
기업에서 꽤 높은 위치에서 일을 하다보면 본인도 권위를 갖게 되지만, 궁극적으로 기업의 소유주나 대표가 아닌 이상 매우 강력한 '특정 권위'에 여전히 예속될 수 밖에 없다. 운이 좋아서 극소수의 '자기 기만을 하지 않는 사람'의 권위하에 놓이게 되면 비록 그의 권위에 예속이 되더라도 '불법적이거나 잔혹한 지시'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찾아보면 그럼 사람도 있지만 결코 쉽게 찾을 수는 없는 종류의 '권위자'인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기만'을 하는 쪽으로 육성되고 주로 그런 사람들이 권위가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 결과에 비추어 보면 65%는 '극도로 잔혹한 지시'를 따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35%도 450볼트까지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일정 부분 지시를 수행하면서 피실험자를 고통스럽게 했다. 아마도 35% 중에서 상당히 미미한 비율만이 합리적인 수준 혹은 전기 고문에 따른 비명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커지기 전에 고문을 멈추었을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 결과는 사실 너무 가혹하게 보일 정도로 인간의 나약함과 멍청함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기 기만'에 매우 능숙하다.
회상하기 싫지만 한심하고 불쾌했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경험한 '자기 기만'에 뛰어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로지 권위에 복종하여 불합리한 결정을 하여 사원들에게 크게 부담스러운 상황만을 만들어 놓고 회의를 종료한 후에 그가 한 행위는 '오늘은 어디에 가서 맛난 술과 밥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과 검색'이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매우 정상적인 사고 과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그에게 전달된 '권위'에 대항할 어떠한 의지도 없고, 따라서 하달된 방향에 따라서 지시를 전달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그는 '즉각적으로 자기 기만'에 빠진다. 상황을 합리화하여 자신의 판단과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면 그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당화하고 합리화를 하면 오히려 일을 더 잘 끝냈다는 생각마저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일을 잘 끝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그가 그 후에 한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의 지시를 받고 뭐라도 행해야 할 사람들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고 '오늘은 뭘 먹을지'를 고민했으니 말이다.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런 경우는 온 세상에서 매일 수십만건씩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참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었고, 따라서 그런 골치아픈 내용을 다룬 회의를 마친 후에 밥을 먹으러 갔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옳은 일을 했다는 생각까지 하는 자기 기만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나의 무능력에 대한 무력감을 느꼈었다. 물론 밥맛도 없었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우리 삶 전체가 밀그램의 실험실과 같은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전압을 100볼트 혹은 400볼트까지 올리면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 전체까지는 좀 과하다고 하면, 최소한 직장 생활을 하는 30년 남짓한 기간 동안은 밀그램의 실험실과 꽤 유사한 환경에서 우리가 삶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삶이 쉽게 흘러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삶을 편하게 살아간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아무리 쉽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나름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삶은 일정 부분 고통을 감수해야만 완수해 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밀그램의 실험실과 꽤 유사한 환경에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적어도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명령을 따라야 하는 동안에는 말이다.
나는 그래서 자신의 가치관과 도덕적 신념을 분명히 정립하고 가급적 그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타인의 명령이나 사회적 압력에 무방비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과 신념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의견도 당당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해야만 한다.
사실 내가 약 5년 정도 일찍 조직을 벗어난 이유가 이런 나의 가치관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그런 실험의 피실험자로 더이상 남고 싶지는 않았다. 30년이면 충분했다. 사람은 안 바뀐다고 한다. 죽어야 바뀐다는 말도 있다. 나름 갈대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고자 노력했지만 결코 난 갈대가 될 수는 없었다. 나의 가치관을 너무 견고하게 지킨 덕분에 지저분하게 몰아친 폭풍에 뿌리가 뽑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원목 재단 과정을 통하여 누군가의 책상이나 의자라도 된다면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