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glecs Aug 01. 2024

자유를 찾아서

가을 이야기 - 다섯

 원래 우리는 자유인이었고 지금도 자유인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경제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더라도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유를 선택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축들처럼 길들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간과 삶이 현재 소속된 조직에 귀속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길 권한다. 회사 혹은 조직은 길고 긴 내 삶의 과정 중에서 한 단락에 불과하다. 비록 좀 길긴 하지만 그래도 단락은 단락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몰입하는 것은 좋지만 틈틈이 고개를 들어서 밖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 당신이 있는 그 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가축화(家畜化)


 주인이 끼니를 알리는 종을 요란하게 치면 여기 저기 들판과 언덕에서 풀을 띁던 염소들이 일제히 우리로 달려오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장면속의 동물은 염소가 아닌 닭, 양, 말 혹은 소 일 수도 있다. 모두 가축이다. 가축(家畜)은 먹이를 주면 먹고 우리에 가두면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어느날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축업자에게 넘겨진다. 대부분의 가축의 정해진 운명이다. 


 약 40~45년전 낮은 집들로 가득찬 주택가에 살때 동네를 돌면서 외치는 개장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많았다. '개 사요!', '개 팔아!'라고 낮지만 굵고 크게 울리는 목소리로 고함치며 천천히 동네 골목을 이리저리 살피며 걸어다니는 그 개장수 말이다. 요즘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인간인 나는 그 목소리가 단순히 거슬릴 뿐이고 '또 개장수가 왔구나' 하는 정도 밖에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우리 집에서 키우고 있던 개들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었다. 개들은 개장수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발자국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낑낑대면서 개집 속으로 깊게 틀어 박히곤 했다. 개장수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때까지 멀어진 후에야 비로서 좌우로 눈치를 보면서 밖으로 겨우 발을 떼곤 했다. 그때는 상당수의 개들도 어떤 면에서는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개팔자와 당시의 개팔자는 사뭇 달랐다. 


 가축 중에서도 돼지나 대규모 양계장의 닭처럼 우리 속에 거의 갖혀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경우는 어디로 도망을 칠 수도 없겠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풀어 놓고 키우는 염소나 양 그리고 말 같은 가축의 경우는 의지가 있다면 주인을 떠나서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철저하게 길들여진 가축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마 자신에게 자유가 부여되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가축은 먹이를 주는대로 먹고 가두면 저항없이 갖혀 있는 것을 선택할 뿐인 자유의지가 완전하게 박탈된 동물이다. 


 표면적으로 가축은 '집에서 특정 목적을 위하여 기르는 짐승'을 의미한다. 인간은 가축들의 고기나 가죽을 팔기도 하고, 소의 경우 인간을 대신하여 자신의 큰 힘을 노동력으로 제공하기까지 한다. 물론 전기와 석유 등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 그리고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계의 보급이 이루어진 이후로 소는 노동력보다는 거의 식용 목적으로 쓰인다. 소의 거의 모든 부위는 먹고 가죽은 물건을 만드는데 쓴다. 가축은 이렇게 그 활용도가 다른 무언가에 의하여 대체되면 대체된 효용 이외의 남은 효용이 다할 때까지 활용되는 식으로 소모된다. 가축은 단순한 소모품이다. 닭을 위한 거대한 포로 수용소 같은 구조의 양계장에 우겨넣어진채 배급된 형편없는 항생제 덩어리인 모이를 쪼아 먹는 닭들을 보고 양계장 주인이 '자식같이 키우는 닭'이라고 말할 때는 어이없는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이보다 더 말같지 않은 말도 없을 것 같다. 아무리 포장해도 '소중한 닭' 정도가 최대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말은 과거에 교통 수단이나 짐을 운송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었다. 지금은 관광객을 상대로 '승마 경험'을 제공하며 서비스업의 형태로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말들은 이유도 모르고 트랙을 질주하면서 자기들끼리 승부를 가리는 달리기를 한다. 인간은 경마라는 형태의 레저라고 부르지만 말에게는 현실적으로 이유없는 질주일 뿐이다. 게다가 경주마들의 왼쪽 눈에는 왼편에 그리고 오른쪽 눈에는 오른편에 작은 가리개 같은 것을 부착하여 옆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주변 사물을 잘 구분하지 못하곤 하는 말의 입장을 고려해서 눈 가리개를 부착하여 주변에서 접근하는 다른 동물로 인하여 느끼는 불안감 혹은 공포감을 줄이기 위한 목적에서 달아준 것이긴 하지만 결국 그냥 편안하게 아무 생각 말고 앞만보고 달리라고 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배려의 이름을 한 구속일 뿐이다. 닭은 정기적으로 인간에게 달걀이라는 형식의 배당을 주다가 나중에 고기로 팔리면서 힘든 가축의 역할을 마친다. 가축은 이들처럼 하나같이 온순하고 성실한 동물들이다. 인간이 시키는 대로 달리고 알을 낳을 뿐이다. 더 맛있는 음식도 더 편안한 잠자리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한 물과 약간의 음식 그리고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의 피난처만 제공되면 계속 자신에게 부여된 원하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인지 조용히 삶을 수동적으로 마감한다.


 대부분의 가축이 온순한 이유는 사실 온순하지 않은 가축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도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가축의 경우 길들이기에 실패하면 그 말로(末路)는 뻔하다. 다루기 힘든 골칫거리 가축들이 먼저 도축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잘 길들여지지 않는 가축들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유순하고 말 잘 듣는 성향의 가축들이 주로 생존을 이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유전자가 계속해서 세대를 이어가면서 전해졌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오늘날의 유순하고 말 잘 듣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축이 된 것이다. 가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애초에 그런 수동적이고 아무 생각이 없는 생명체가 아니었지만 긴 시간 동안 조금씩 형질이 완전하게 인간에게 길들여진 수단으로써의 '가축'으로 변형 되었을 것이다.  




 사축화(社畜化)


 약 20여년 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인 사축(社畜)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들어봤을 것이다. 사축이란 회사와 가축을 합쳐서 만든 말이다. 자신의 자유 의지와 인생을 회사에 완전히 저당잡혀서 회사에서 기르는 가축과 같은 입장이 되어버린 직장인들을 묘사한 것이다. 다만 '사축'이라는 말이 20여년 전에 등장했을 뿐이지 인간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부터 고용과 피고용이라는 관계가 수립되었을 때 이미 '사축'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축들은 회사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사축들'로부터도 피해를 입기도 한다. 회사에 인생을 저당 잡혀서 그 회사의 사축이 된 또 다른 '고위직 사축'들이 자신도 사축인 줄 인지하지 못하고 동료 사축을 애먹게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회사의 실 소유주를 제외한 모든 급여 생활자들은 다 본질적으로 '사축'이다. 따라서 월급을 받는다면 '사장'도 사축이다. 다른 직원들 보다 단순히 보수가 월등히 많다고 사축이 아닌 것은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포장을 예쁘게 해도 계약에 따라서 노동을 팔고 있는 사람들은 '사축'이다. 프리랜서의 경우는 비교적 자유롭게 일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역시 본질적으로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제공하는 '고객'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광의의 '사축'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일 지도 모른다. 물론 회사에 온전히 매여있는 사축보다는 훨씬 자유롭다.  


 2010년도에 인기를 상당히 끌었던 미드 스파트타쿠스(Spartacus)는 검투사 양성소가 주무대이다. 당시 Blood and Sand라는 시즌1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무대의 배경으로 검투장이 자주 나올 수 밖에 없기때문에 피가 낭자하는 폭력 장면이 다수 나와서 사실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그 드라마의 주요 인물로 '바티아투스'라는 검투사 양성소 주인이 있고 그 양성소에서 엄격하게 '노예 신분인 검투사'를 훈련시키는 '오에노마우스'라는 교관(독토레)이있다. 오에노마우스는 꽤 권한을 갖고 있고 아내도 있었지만 역시 다른 검투사들과 동일한 노예의 신분이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노예는 가정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남다른 능력과 충성심으로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있어도 자유롭게 만날 수는 없었고 승인을 받고 일정 시간만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는 실력도 있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십도 있는 꽤 괜찮은 교관이었지만 노예라는 신분은 바꿀 수 없었다. 그도 결국 본질적으로 고용주에 귀속된 '사축'이었고 진정한 자유인은 양성소의 실제 소유주인 바티아누스밖에 없었다. 


 주인의 말을 잘 따르는 유순한 가축만 그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면서 순하고 복종적이며 아무 생각이 없는 가축만 현재까지 인간이 인정하는 '온전한 가축'으로 그 유한한 삶을 이어가고 있듯이 조직의 권력과 권위에 타인보다 좀 더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인간이 '사축'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급여를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자들을 동물로 격하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조직에서 원하는 대로 일을 과도하게 하고 급여에 대하여 큰 불만 없이 조직의 발전을 위하여 주어진 일을 계속하는 것을 별 저항없이 선택한 사람들이 대부분 오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30년을 한 직장에서 일한 나야 말로 전형적인 '사축'의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한 개인으로써 큰 시스템의 미미한 부분으로써 기능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상당히 오랜 기간 유지해온 것이다. 나의 경우가 앞서 언급한 오랜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의 전형이었다. 조직에서 원하는 대로 일을 과도하게 하고 급여에 대한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급여가 높아서 불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입된 행동 강령에 따라서 수 십 년간 그 의미도 모른채 회사에서 부여받은 역할에만 충실하면서 삶을 살아낸 것이다. 주변 인들이 사축으로 둘러싸여있으면 자신도 사축일지라도 그게 당연한 줄 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뭔가 찜찜함을 계속 느꼈지만 그냥 계속 열심히 일을 하면 진급을 하고 급여가 올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현상유지에 급급했다. 간혹 조직을 떠나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선택도 결국 다른 주인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이었지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거대한 사회라는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서 사축은 필수 불가결이다. 모두 자유로워지면 시스템은 결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사축화는 그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부여받았다. 개인은 좋은 주인(대기업)을 만나서 안전과 더 높은 보상을 제공받으면서 삶을 소모하는 것을 제일 선호하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대다수 인간의 사축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목적에 맞게 길러지는 개인


 개인은 국가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된다. 학교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다.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에 필요한 구성원으로 개인을 탈바꿈시키는 것도 중대한 학교의 존재 목적이다.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을 양성하고 교육할 필요는 없으니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제1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 사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에 대한 최대한도의 활용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 사회라는 시스템은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에 적절한 사람으로 개인(국민)을 교육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개인은 그 국가 혹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길러지게 된다. 국가 혹은 그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개인에 대한 그런 식의 교육은 불가피하다.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교육 환경에서 길러진 개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둘러싼 교육 환경에서 훈육되어 향후 사회에 필요한 사람(자원 혹은 부품)이 되는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게 된다. 마치 자신의 선택이었던 것 같지만 좀 더 들여다 보면 사실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한 구성원인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시스템을 위해서 기능하도록 육성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진다. 농경사회라면 특별한 교육이 필요 없이 건강하고 순종적인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그리고 현대와 같은 고도로 기술이 필요한 사회에서는 그런 역량을 갖춘 사람을 키워야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써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기술을 갖게 하기 위한 교육 기관과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한다. 이런 것이 '주어진 교육 환경'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런 풍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만든 학교가 바로 대안학교이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가치와는 다른 가치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런 가치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학교인데 요즘은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정식 교육 기관으로 인정을 하는데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식 교육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대안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대입을 치루기 위해서는 별도로 검정고시를 치루어야만 했다. 교육의 다양성 그리고 국민의 배울 권리에 대하여 사회적인 공감이 확대되면서 정책적으로도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부모가 홈스쿨링을 통하여 자녀를 교육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는 교육적인 목적도 있지만 그만큼 폭력과 총기 사고에 대한 위험에서 자녀를 지키기 위하여 홈스쿨링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아마도 거의 대부분 우리나라 교육 방식에 대한  거부감에서 홈스쿨링을 할 것이다. 획일적 시스템에서 길러진 부모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맹점을 파악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자녀들은 그 시스템에 예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교육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기존 시스템에서 운용하는 교육 과정을 통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길러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선택의 기회는 여전히 있다


 사축이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글에서 수 차례나 반복될 때 꽤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비록 고용되어 노동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긴 하지만 그래도 '사축'은 너무하지 않냐는 항변이 있을 법하다. 계속 본질적인 '사축'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지만 사실 나도 '사축' 이라는 표현은 과도하게 개인을 구속하는 또 하나의 굴레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보통의 '직장인'들이 실질적으로 노예인데 자유인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는 자유인인데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것인지 판단이 필요할 것 같다. 


 내 생각은 아무래도 후자가 맞다. 원래 우리는 자유인이었고 지금도 자유인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경제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더라도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유를 선택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축들처럼 길들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이 의문을 갖는 분께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의 일독을 권한다. 한 정신과 의사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3년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생 끝에 결국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뚫고 자신의 삶을 지켜낸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뭔가 뭉클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는 매일 선택을 해야 했는데 그 내적인 선택의 주체는 그를 억압하는 나치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다른 수감자는 대부분 선택을 당하는 입장이어서 단지 두려움 속에서 지냈고 결국 다수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는 달랐다. 아우슈비츠라는 극악의 수용소에서는 거의 매순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빅터 프랭클은 그렇게 공포와 두려움만이 온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죽음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조차 그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책에서 인용된 니체의 말인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말과 같이 그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잃어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수감자(사축이든 아니든)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결국 수용소(회사)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 개인의 내적 선택의 결과가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면 유독 스트레스 내성이 강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엔 꼭 그런 사람이 소수 존재한다. 심지어 성과도 좋다. 아마도 그들은 '사축'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 직장인이지만 내적으로는 엄연한 자유인일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삶이 현재 소속된 조직에 귀속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길 권한다. 회사 혹은 조직은 길고 긴 내 삶의 과정 중에서 한 단락에 불과하다. 비록 좀 길긴 하지만 그래도 단락은 단락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몰입하는 것은 좋지만 틈틈이 고개를 들어서 밖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 당신이 있는 그 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이미 사축으로 살아온지 10년 혹은 20년이 되었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지만 시도해 보길 권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