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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Jul 23. 2024

산책 방해꾼




지렁이는 물을 피하기 위하여 물로 나온 것이고 달팽이는 물을 더 많이 맞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다. 서로 빗 속으로 들어왔지만 이유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인간인 내가 빗속으로 나온 이유도 그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직 한창 장마철이다. 그래서 아파트 거실에서 보이는 하늘은 산수화 속 먹물색 농담처럼 여기저기 거무스름하거나 옅은 회색빛으로 얼룩져있었다. 습한 대기를 뚫고 아침부터 장대비가 엄청나게 왔는데 그때 짙은 구름이 잔뜩 머금고 있던 수분을 쉴새없이 토해내서인지 마침 하늘이 잠시 입을 다문 것 같아서 서둘러서 밖으로 나왔다. 우리집 아파트 1층 현관을 나와 우측으로 가면 재활용장이 나오고 좌측으로 가면 아파트 단지 외곽을 두르는 작은 정원이 나온다. 나의 산책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적어도 하루에 5km 정도는 걷고 싶은데 비가 오면 아무래도 집을 나서는 것이 꺼려진다. 그래도 막상 밖으로 나오면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걸으면 그 맛이 사뭇 나쁘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던 말던 산책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 어쩐지 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으면 집안에 처박혀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빗속을 걷는 것도 운치가 있고 좋지만 높은 아파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과 그 산을 둘러싼 빗속의 안개 그리고 커다란 비닐 하우스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 나는 웅장한 북소리 같은 비내리는 소리를 아파트 15층에서 듣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리라. 


 잠시 비가 소강 상태인 하늘을 보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하늘이 언제라도 비를 다시 토해낼지 모르기 때문에 우산도 꼼꼼히 챙겼다. 1층 현관에서 나와서 몸을 좌측으로 돌려서 산책 출발점에 도착했다. 거기서 계단을 밟고 검붉은색과 옅은 노란색 혹은 회색 보도 블럭이 불규칙한 패턴으로 깔려있는 폭 2m산책로를 8m 정도 걸어가면 그 길은 다시 우측으로 길게 이어진다.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은 무늬로 굳이 보도 블럭을 깔은 이유가 뭘지에 대하여 잠시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잊어 버리고 나만의 산책 코스를 따라서 그날의 산책을 시작했다. 


 사실 산책을 제대로 하려면 머리속을 비우고 주변 풍광(風光)을 천천히 보면서 아무 생각이 없이 걸어야 하는데 비가 왔거나 비가 오는 날의 산책에는 방해꾼이 나타나서 만족스러운 산책을 하기가 쉽지 않다. 지렁이와 달팽이가 그들이다. 지렁이는 몸 색깔이 옅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고 달팽이는 연한 갈색 혹은 아주 옅은 노란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자연 속에서 천적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보호색을 사용하는 생명체들이 많다. 대벌레는 완전히 나뭇가지와 닮았고, 잎사귀벌레는 나뭇잎과 놀랍도록 유사해서 천적이 쉽게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게 만든다.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 몸으로 터득한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다. 지렁이와 달팽이도 천적으로부터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그런 몸의 색깔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둘 다 흙색과 매우 유사해서 언뜻보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렁이는 젖은 흙색과 유사하고 달팽이는 마른 흙색과 유사하다.    


 아파트 보도 블럭의 색깔도 옅은 검붉은색과 옅은 노란색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이때문에 옅은 붉은 색의 지렁이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고 달팽이도 아차 하다가 못 보고 밟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색깔이 보호색이라면 적어도 아파트 주변에서 산책하는 나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험에 노출된 것일 뿐이다. 지렁이가 움직이지 않고 몸을 길게 뻗고 있을 때는 땅에 떨어진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비슷하고 달팽이는 작은 자갈로 보여서 밟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시력이 좋지 않아서 더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렁이와 달팽이를 밟는 것은 누구에게도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아무리 실수라도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밟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물컹함 그리고 바사삭하고 달팽이 껍질이 깨지는 느낌이 순식간에 내 발바닥 신경세포를 타고 두뇌까지 전달되기 때문에 밟는 그 순간에 바로 온 몸은 불쾌감에 움추러든다. 그리고 동시에 지렁이와 달팽이의 좌절감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 비가 온 뒤 혹은 비가 올 때 산책을 하는 경우엔 주변의 풍경을 보기 보다는 머리를 처박고 바닥을 보면서 걷는 경우가 더 많다. 간혹 특정 구역에 지렁이와 달팽이가 다수 출몰해 있는 경우에는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뒤뚱거리면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지 않으면 그 구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들이 나의 산책에 순전한 방해꾼인 이유이다. 


 그러나 지렁이와 달팽이는 사실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리고 그들의 몸 색깔은 간혹 산책을 하는 인간에게는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천적에게는 혼란을 야기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온전히 보호색의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눈에도 헷갈리니 그들을 먹이로 노리는 다른 동물들, 예를 들면 새 같은 동물들의 눈에도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인간을 별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지렁이나 달팽이를 일부러 죽이거나 잡아 먹지도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들의 천적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위장술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잘못된 장소로 진입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집에서 나와서 내가 산책하는 코스는 어느 지점을 경유하느냐에 따라서 정해지는데 보통 비가 올 때에는 집에서 2km 반경인 구불구불한 코스로 약 5~6km 정도의 코스를 선택하고 날씨가 좋을 때는 반경을 3~4km까지 늘여서 총 7~8km 내외의 코스를 선택한다. 이날은 비가 오락 가락하고 비가 올 때는 꽤 세차게 왔기 때문에 좁은 반경의 코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코스는 대부분 옅은 검붉은 색, 옅은 노란색 혹은 갈색의 보도 블럭으로 뒤덮혀 있는 길이었다. 그 산책로의 좌우측에는 잔디밭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렁이는 땅을 뚫고 나와서 산책로로 나오고 달팽이도 조경수나 풀에서 서둘러 내려와 지렁이를 따라서 산책로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빗물에 이끌려 하필 잘못된 장소로 말이다.  


 사실 비오는 날 지렁이가 땅 밖으로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숨을 쉬기 위해서이다. 결코 비가 좋아서 나온 것은 아니다. 비가 오면 땅속에 물이 차고 공기가 평소보다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피부호흡을 하는 지렁이는 살기 위해서 숨을 쉬려고 땅 밖으로 나오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달팽이 역시 온 몸이 점액질에 덮여 있는 것만 봐도 습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에도 습기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하여 습한 곳에 조용히 머물다가 비가 오면 이때다 싶어서 마음껏 물을 즐기기 위하여 밖으로 외출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렁이는 물을 피하기 위하여 물로 나온 것이고 달팽이는 물을 더 많이 맞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다. 서로 빗 속으로 들어왔지만 이유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인간인 내가 빗속으로 나온 이유도 그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튼 그들이 빗 속의 산책로에 침범한 이유는 적어도 나같은 인간처럼 산책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내게 그들은 단순한 하루의 산책을 불편하게 하는 방해꾼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나같은 거대한 몸을 가진 동물은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극도로 위험한 존재이다. 나는 그들에게 단순한 방해꾼을 넘어서는 매우 위협적인 '악의 축'일지도 모른다. 언제 하늘에서 그들의 온 몸통을 향해서 내려 꽂힐지 예측도 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인 것이다. 만약 그들의 관점에서 나라는 인간이 인식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나의 모습은 거대한 판일 것이다. 내 발바닥 밖에는 나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주변을 천전히 걸으면서 맑은 공기도 마시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기 위한 나의 산책길이 또 다른 생명들에겐 황천길일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 시점에서 과연 누가 누구의 방해꾼인지 애매해진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렁이와 달팽이는 내게 작은 방해꾼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그들에게 잔인한 '악의 축'이니 절대적으로 불리한 쪽은 지렁이와 달팽이다. 그들에게 나는 완벽한 가해자일 뿐이다. 내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내가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지구행성에서 살아가는 이웃으로는 그렇게 환영받는 존재가 되지는 못할 것 같다. 


 비록 내가 지렁이나 달팽이에게는 도저히 환영받지 못할 '악의 축'이라는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인간에게만은 그런 존재가 아니길 바란다. 그러나 지나온 수 십 년간 부지불식간에 지어온 업(業)이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라도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자신을 돌아봐야 할 이유는 이렇게 도처에 깔린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설익은 말을 통해서 혹은 섣부른 행위를 통해서 타인에 대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시도 허투루 살아서는 안되겠다. 지렁이와 달팽이를 밟으면 나도 불편하고 불쾌하다. 이렇게 가해자도 영향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나의 설익은 말과 섣부른 행위가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런 말과 행위를 한 나 자신도 일정부분 내상을 입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낮인데도 하늘은 여전히 어둑하고 흐리다. 오늘의 산책은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산책중이다. 인생이라는 산책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종착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의 남은 산책길이라도 두루두루 주변을 잘 살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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