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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Jul 21. 2024

양재천 포도주

 






지인과의 약속


 지난주부터 계속 비다. 장마전선이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전국에 비를 뿌리고 있다. 간혹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가 내리기도 했다. 안경에 뿌연 김이 서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는 내 시야를 아득하게 만들곤 했다. 다음주 금요일인 7월 26일이 기상청이 주장하는 금년 장마의 끝이다. 예측이 맞기를 바란다. 오늘 오래 간만에 만든 지인들과의 약속 장소가 서울 양재동이어서 인천에서 제법 먼길을 가야 했는데 서울 시내 도로 이곳 저곳이 침수라는 뉴스가 나와서 운전은 커녕 버스도 타기가 찜찜한 상황이었다. 자치잘못하다가 길이 막혀버리면 약속 시간에 제때 도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상 환경에 따른 불가피한 외통수에 걸리면 정말 대책이 없다. 늘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써는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바로 어떤 이유에서이든 늦는 것이다. 어떤 약속이건 늦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지독한 고집이다.  


 이런 나의 철저한 시간 관념 때문인지 언제나 그렇듯이 방법은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엔 더 간단했다. 교통편만 지하철로 바꾸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작년에 비가 엄청나게 왔을 때 일부 강남 지역의 지하철역으로 빗물이 넘쳐서 지하철 운행에 큰 차질이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금년에도 만만치않게 비가 왔음에도 그런 뉴스는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한 번 크게 혼쭐이 난 후에 방비를 제대로 한 모양이다. 이것이 내가 지하철을 차선책으로 선택한 이유다. 만약 지하철 역에 빗물이 넘쳤다는 기사가 나왔다면 아마 나는 약속 시간을 두 세 시간 앞서 출발했을 것이다. 고지직하고 답답하며 병적인 완벽주의다. 그리고 남에게 불편을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다섯시 반에 3호선 양재역에서 약 8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양재천 포도주'라는 와인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정확하게 운행되는 지하철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2~3분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포공항역에서 9호선 급행을 타고 3호선 연결역인 고속버스터미널역까지 왔어야 했는데 실수로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일반 지하철을 탔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평소처럼 약 30분 정도 이른 도착을 할 수 있도록 여유롭게 잡은 버퍼 시간은 거의 다 날아가 버렸다. 약속이 있을 경우에 나는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지연될 것을 대비하여 언제나 최소한 30분의 여유를 두고 출발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30분 일찍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따라서 보통 미리 도착하면 도착지를 기점으로 주변을 잠시 산책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다. 여유를 두고 출발하면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여 좋고 예상대로 일찍 도착하여 시간이 남으면 새로운 곳에서 잠시나마 산책을 하면서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다. 아쉽게도 이날은 어쩔 수 없이 산책을 생략해야 했다.




다시 이어진 인연


 '양재천 포도주'에 도착했을 때 비는 어느새 부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나빠진 시력 때문에 아주 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냥 대기가 뿌옇고 미세하고 습한 먼지에 침범당한채로 정지된 느낌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가볍게 불어온 바람이 분무기로 물을 살짝 뿌린 듯한 정도로 미세한 수분을 대기로부터 내 얼굴로 털어내면서 매우 가는 부슬비의 존재를 비로서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비가 오고 있긴 했던 것이다.  


 낮이 긴 한 여름의 다섯시 반경은 대낮같이 환하지만 그날은 하늘을 온통 채우고 있는 짙은 먹구름 덕분에 시간은 다섯시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약간 초저녁 느낌이 들 정도의 희미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마시기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분명히 비도 오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와인을 꽤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와인바를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집에서 혼자 와인을 즐기거나 아니면 콜키지를 주고 일반 식당에서 주로 마셨기 때문이다.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데 피씨방에 가본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튼 무더운 날씨와 와인은 잘 매칭이 되지 않는데 그날은 날씨 덕을 분명히 본 것 같다. 비오는 날의 와인을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엔 부침개와 막걸리도 좋지만 말이다. 


 양재천 포도주라는 와인바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여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밝게 웃으면서 '오셨네요!'라고 바의 맨 뒷 편의 칸막이로 가려진 쪽에 있는 테이블을 보면서 나와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들에게 동시에 밝지만 차분한 톤으로 말을 건냈다. 그녀가 나를 아는 눈치여서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약 4년 전에 퇴사한 회사 직원이었던 것이다. 간혹 그 친구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갈 일이 있을 때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정도로만 알고 지냈었는데 퇴사 후에 이곳에서 와인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약속을 잡은 회사 선배가 잘 아는 직원이었고 그래서 그곳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 것이었다. 인연은 이런 식으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다시 이어지는 모양이다. 내 선배도 와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와인을 너무 좋아하는 분이다. 심지어 잘 알고 지냈던 후배 사원이 와인바를 한다니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은 만남의 장소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친구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4년 이라는 시간 동안 외모의 역변이 일어난 것 때문이 아니라 얼굴에 살이 미세하게 붙었고 특히 회사에서는 늘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와인바 사장이 입을 만한 예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특히 와인바의 특성상 실내 조명이 좀 어두운 것도 내가 즉시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지인들에게 나를 안내를 할 때 테이블 위에 있는 약간 밝은 부분 조명으로 인하여 좀 더 환해진 상태에서 다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니 그때야 예전 얼굴이 정확히 떠올랐다. 그녀는 나의 지난 인연 중에서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인연이었기 때문에 늦었지만 그제서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가 왜 와인바를 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성격과 외모는 와인바에 최적일 것이다. 재직시에 고객을 응대하는 업무를 매우 잘 했기 때문에 와인바에서 손님 상대를 프로수준으로 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외모가 매우 뛰어난 편이기 때문이다. 외모 지상주의는 일부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지만 외모는 사실 서비스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외모가 아무리 뛰어나도 고객 응대에 적절하지 못한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이라면 서비스업에서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외모 만큼 혹은 그 이상 중요한 것이 태도이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미소 없는 얼굴은 향이 나지 않는 꽃과 같다. 처음 볼 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지만 보기와 달리 아무런 향이 나지 않으면 그 꽃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외모가 뛰어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미소는 꽃향기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향기는 고객에게 서서히 그러나 깊게 배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그곳으로 다시 부를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가서야 비로서
거기에 필요한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미 그 자리에 맞는 특성과 역량을
갖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특성 혹은 역량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숨겨진 모습


 오래 간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그날 나는 옛 인연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예전처럼 밝은 미소 그리고 환하게 빛나는 웃음을 그녀에게서 재확인했는데 사실 그건 그녀의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전에도 밝은 미소를 늘 지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날 발견한 그녀의 새로움은 생각외로 그녀가 이야기도 꽤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업무상 짧은 대화밖에는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현란하고 능숙한 언변을 경험할 없었던 모양이다. 그날 그곳에서의 만남은 업무가 아니라 즐거운 과거 인연들과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그녀도 잠시 같이 자리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그녀의 활기찬 모습을 것이다. 


 그녀는 의외로 밝고 쾌활한 성격이고 거기에 아름다운 미소까지 발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언변도 훌륭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건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아님에 틀림없다.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던 본래의 여러가지 모습이 새로운 환경에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녀는 예전에도 언변이 뛰어났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기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타인에게 포착되지 않은 것이다. 이젠 상황이 바뀌어서 다양한 주제로 고객과 이야기를 해야 하고 따라서 내재된 자신의 타고난 성격과 능력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냐에 따라서 자신을 여러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타인에 의하여 규정된 나의 모습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야 한다. 나의 감춰진 모습이 더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계속 같은 삶을 유지하면 또 다른 나의 모습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생각엔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가서야 비로서 거기에 필요한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미 그 자리에 맞는 특성과 역량을 갖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게 되면서 비로서 역량이 발휘되는 것처럼 보이니 타인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리는 사람을 만들지 않고 어떤 자리에 갔을 때 비로서 내재되어있던 그 자리에 맞는 특성이나 역량 혹은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매커니즘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변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이다. 특히 조직 내에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고 부하직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갑자기 권위적으로 변하고 위세를 부리며 자기 주장이 강해지고 타인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높은 위치에 오르기 전에는 협조적이고 타인의 이야기도 잘 들어 줬는데 조직내에서의 위치가 바뀌고 나서 너무 다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자기에 올라가서 변한 것이 아니라 자리, 즉 힘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본래 성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을 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의 감추어진 모습은 언젠가 드러날 수 있기도 하고 영원히 우리 영혼속에 갖혀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다양한 삶의 경로를 겪으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드러나 있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진정한 모든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앞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던 우리의 또 다른 본모습이 그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자신이 드러내는 또다른 면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고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 모습 그대로 나의 삶을 살더라도 그게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제3자의 시각에서 자주 관찰해 보고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양재천 포도주'를 열면서 자신 속에 원래 있던 특성을 마음껏 꺼내 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또 다른 면은 공동체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부러운 일이다. 언제 또 그곳에 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 번은 더 가볼 참이다. 서울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에 적절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특히 '양재천 포도주' 근처에서 산책을 꼭 한 번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산책을 마치고 나의 또 다른 인연과 함께 그곳에서 향기로운 와인을 한 잔 하면 더할 나위 없는 하루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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