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밤, 몰랐던 마음
호감의 감정을 배우고, 첫 연애가 허무하게 빨리 끝났 음에도 여전히 나는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호감이라는 감정을 이제 겨우 알겠는데, 그게 이성적 인지 인간적인지 구별하는 것도 조금은 알겠는데.
좋아한다는 건 뭘까?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난 진실성 있을 수 있을까?
난 겁이 많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감정 앞에서, 과연 솔직할 수 있을까?
첫 연애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그때의 나는 사랑을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모른 채 시작했고, 당연히 감정 없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었다.
시작부터 잘못된 사랑이었다. 나는 상대를 아끼는 법을 몰랐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 날카로워졌다. 서로를 할퀴면서 끝까지 붙잡고 있던 게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끝난 사랑 뒤에, 나는 더 신중해졌다. 좋아하는 감정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은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 내 남자친구의 친구인데, 소개해줄게. 한 번 만나봐
첫 시작은 그렇게 가볍게 시작했다. 친구네 커플과의 밥 먹는 자리에서 만나 단 둘이 연락을 하게 되기까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폭염이던 그 여름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날을 기억한다. 아니, 사실은 네 기억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이 날이 가장 생생하게 떠오른다. 더운데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자고 고르라며 웃던 미소가 참 따사로웠지. 편의점 앞에서 같이 산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다 널 쳐다봤을 때, 그때 난 알 수 있었다.
드라마 속 남녀주인공이 서로에게 반하게 되었을 때, 모든 상황이 느릿하게 흘러가지 않든가? 그 시절 그가 나한텐 그랬다. 바람에 머리칼을 살랑이며 날 바라보는 그 시간이 멈춘 세상 속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고, 그날 난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뜨거운 이 감정을 혹여나 들킬까 봐 숨기기 급급했다. '첫눈에 반하다'라는 게 이런 현상이라는 건, 그를 놓치고 한참뒤에야 깨달았지만.
뜨거운 여름날, 꽤 많은 시간을 두근거렸다.
날이 더워 땀에 붙어버린 앞머리를 웃으며 군말 없이 정리해 주던 날, 후배에게 빌려왔다고 자신은 하나도 안 덥다면서 손풍기를 쐬어주고는 시원한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손풍기를 건네받고는 땀을 식히던 모습, 첫 만남 때의 착장을 기억하고 바뀐 귀걸이를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던 그에게. 날이 더워 괜히 짜증 부리면 그런 날이 있다며 오히려 날 다독이던 그가 잊힐 날이 오려나. 예뻐 보이고 싶어 굽 있는 신발을 신고 간 날에는 불편하겠다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여전히 기억나는 걸 보니, 내게 변함없이 따스했던 사람이었음을.
더운 여름밤, 알코올의 힘으로 전화로 좋아한다며 사랑을 속삭였던 그를 믿지 못한 나를 가끔 원망한다. 용기 내서 만나서 다시 말해달라고 할걸.
사랑에 하염없이 어리숙하던 나는, 사랑인지도 모르고 이전과 같은 사랑 따위 하지 않겠다며 좋아하지 않으니 그의 사랑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체 뭐길래. 보내고 나서야, 놓치 고 난 후에야 이리 마음이 저린 것인지. 감정을 깨닫기 까지도, 깨우친 이후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후회하는 시간도 이렇게 길 수밖에 없는 일인가?
사랑임을 몰랐던 나에게, 누군가 한마디만 해줬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네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해. 말 안 하면 아무도 몰라.’ 그렇게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주변을 원망해 보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또다시 후회였다.
- 우리가 인연이면 또다시 만나게 될 거야.
당당하게 그 말을 외쳤지만 그 인연을 내가 만들었다면 , 내가 내 감정을 일찌감치 깨닫고 우리를 이어갔다면 그때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는 상황이 또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어. '사랑은 눈송이 같이 하나 둘 흩날려 떨어질 땐 아무런 무게도 부담도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마을을 덮고 지붕을 무너뜨리듯 빠져나오기 힘든 부피로 다가올 것만 같다'라고.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감정을 깨닫고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지. 주인공이 참으로 부러웠다. 빨리 깨우친 감정이, 확신할 수 있던 상황이. 뭐가 그리 무서워서 난 겁을 냈을까.
첫사랑은 여전히 종종 떠오르는 존재지만,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방법을 여전히 모른다. 더 나은 사랑을, 더 성숙한 사랑을 한다면 이제는 안 떠오르리라 생각하지만 연못 위 떠돌던 나뭇잎 한 장같이 유유히 기억을 떠다닐 것 같다. 그 나뭇잎은 언젠가 물속에 가라앉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마음 한 편에 머무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