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하루하루는 다시는 아침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은 심연의 밤으로 끝이 나곤 하였다. 인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회사의 경영권 분쟁.. 법무팀과 로펌에서 잘 알아서 처리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감사 한번 해보라기에, 결사의 각오로, 소장을 읽고, 답변서를 읽고, 증언녹취서(Deposition)를 읽고 또 읽고, 회계장부를 까고 또 까고.. 공성전 못지않은 지루함과의 연속 전투였다.
시간이 가니 성과가 오고.. 출장 온 모두들 흥에 겨워 귀국하는데, 나더러 며칠 더 남아 구 경영진을 옥죌 기만(欺瞞)의 증거를 더 더 찾으란다. 밤이 길어서일까 내뱉는 숨들이 덩달아 길어졌다.
출장 연장 사흘째 아침, 산타 클라라 호텔을 체크아웃하였다. 돌이켜 보면, 객기의 결단이었다. 우버 택시에 올라타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가자하였다. 그곳에서 테슬라 모델 S를 빌렸다. 오라클파크를 지나고, 피셔맨스워프를 지나고, 안개 짙은 금문교를 건넜다. (자율주행 모드를 켜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 시간을 달려 나파밸리(Napa Valley) 날개 아래 소노마 카운티의 페탈루마(Petaluma)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날 저녁, 성근 노을빛 맥주 한잔, 노르스름 땅콩 몇 알, 장밋빛 와인 한잔, 거무튀튀 비프 저키.. 고달픈 날들과의 완벽한 이별이었고, 나파밸리 와인을 향한 오만했던 오랜 동경을 은밀한 현실로 바꾸려는 정성스러운 제(祭) 의식이기도 하였다.
3월의 바람이 몹시도 차더니만, 그날 밤, 한바탕 큰 비가 쏟아져 내렸다.
두꺼운 구름 잔해를 남기긴 하였어도, 아침이 되어 날이 개었다. 망설임 없이 호텔을 나섰다. 와이너리를 찾아야 할 텐데.. 예약해 둔 곳도 없고, 아는 곳도 없고.. 내비게이션 하나를 믿어 글렌 엘렌이란 마을을 지나고 굽이굽이 산길을 기어올랐다.
마운트 비더 고갯마루 넘는 길에는 고요의 바람이 불었고, 나도 문득 고독하였다. 그 길 한 점에 멈춰 서서, 바람에 맞서며, 고개 너머 포도밭 존재의 어떤 증거라도 찾아보려 애를 썼다. 그때였을 것이다. 거대한 부(富)의 존재와 불가침의 경계를 고지하는 긴 울타리망 앞에서 (까맣게 잊었던) 익숙한 눈빛들을 보게 되었다. 진정으로 난데없었다.
캘리포니아 외딴 산속 한바람의 만남이었다. 진실일까, 몇 번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서로가 그렇게 우연히 떠나온 고국의 명백한, 가슴 뜨거운, 증거가 되었다.
'하르방 하르방 어쩌다 먼 길 왔소? 뭣하러 여기 섰소? 나는 이제 그만 갈라요. 커다란 개 저쪽에서 날 쫓아 올 지도 모르겠소.'
그래도, 이딘 보름도 하영 불엄져.*
오퍼스 원(Opus One) 와이너리 같은 유명세는 오롯이 내 것이 될 리가 없었다. 계곡 어딘가 숨은 듯 들어앉은 곳은 없는 것일까.. 크고 작은 포도밭을 징검다리 건너듯 훑어 지났다. 3월의 포도나무에 수액이 다시 흐르는 것일까, 어느 나무 아래에는 싹이 다 텄다. 포도의 대지에 봄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우연이 인연이 된 것일까, 세인트 프란시스 와이너리를 찾아내었다. 입구의 높은 망루 밑을 호기롭게 지났다. 비시즌일 텐데도, 넓은 홀은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정말이지 의외였다.
"혹시 와인 시음도 가능한가요?"
"네. 와인과 식사를 페어링 하여 인당 150불입니다."
그 돈이면.. 조건반사적 판단이었다. 긴 폭염에 지쳐 쪼그라드는 포도알인양 남편의 땡볕을 버텨내다 눈가 주름만 늘어가는 아이들 엄마에게 링클 프리 아이크림 하나 사 가는 편이 훨씬 낫겠다 싶었다. 줄행랑의 전조인양 위압적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포도밭 좀 둘러봐도 괜찮은 거죠?"
포도밭 가까이로, 사이로.., 걷고, 귀 기울이고, 바라보았다. 간헐적으로 내리쬐는 햇빛은 생명의 빛으로 반짝이고, 포도나무 사이로는 바람이 낮게 날았다.
글쎄, 이런 기쁨이 어디 쉬울까.
약혼 준비에 관한 풍경일 터였다.** 여자의 머리끝에서 규칙적으로 나부끼는 하얀 베일은 아마도 포도나무꽃 수천 개 잎에 하나하나 흰 물을 들였겠다. 그렇게 한참을 포도나무의 바람 곁에 머물렀다. 들러리들은 연신 크고 작은 웃음을 터트려댔다.
우아한 이벤트에 어울리는 것들..? 루이뷔통. 샤넬. 디올.. 바람이 서늘하여 그 생각은 아주 짧게 머물렀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프루닝(Pruning)의 겨울..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고, 우리도 순환하였다. 그렇게 먼 기억이 늘어만 갔다.
"우리 애들한테도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삶이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아이들 엄마의 간헐적 멘트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키 큰 나무 밑을 지나고, 바람이 아름다울 때를 기다려, 포도나무 사이 웨딩아일을 둘이서 걷고 싶었다.
설명할 수 없는 색깔들로 물들어 바람은 달콤한 웨딩부케 같으리라.
햇빛 조각 웨딩아일은 폭염에 메말라 간 두 사람의 과거를 흉보리라.
열매를 품어 제 한 몸 살찌우지 못한 포도나무 하객들은, 원망을 말고, 용서도 말고, 과거에 마음을 두지도 말라고 간섭하리라.
난 여전히 머리끝에서 하얀 베일이 뻗어 나온 완벽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바람에 내 깊은숨이 잠시 머물다 말없이 떠났다.
너무 비싸길래, 그냥 떠나온 와이너리. 나파밸리 가장 깊은 곳 동쪽 가장자리 실버라도 트레일이나 걷자꾸나.. 무작정 걷기 시작하였다.
"포(ㅅ).도(ㅏ).밭(ㄴ)이 부른다. 구름에 솟은 산이. 햇빛도 따스하고 바람도 시원해.." 내 멋대로 노래하였다.
나파 강 상류와 나란한 길가에서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였다. 인적은 없었다. 그 집 담벼락 아래 잠시 실례를 하고 돌아서던 그때, 아메리칸 불리 한 마리 거너린 쉽지 않은 인상의 남자와 마주쳤다. 아무 짓도 안 했기에.. 단도직입적 질문을 던졌다.
"혹시 사장님이신가요? 그렇다면, 와인 테이스팅 좀 가능할까요?"
남자가 씩 웃었다. 단체 손님 맞을 준비 하러 나오는 길이라 하였다. 시간 좀 있으니 테이스팅 한번 해 보자길래.. '그래, 아까 도둑 소변은 못 봤던 거야.', 기쁨에 겨워 뒤로 바짝 붙어 섰다.
오, 오번 제임스 와이너리!***
'1001'이라 적힌 와인병의 코르크를 뽑아내었다.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말벡.., 위선의 자세로 보르도 블렌딩 와인의 첫 잔을 영접하였다.
바로 그때.. 아까부터 무척 거슬리던, 덩치만 작았지 투견에 적합하게 생긴, 그 개가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개는 본능적으로 "맛이 어때요? 나 치즈 하나만 줄래요?" 그 말을 하려던 것임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
묵직한 경고를 날렸다. "Get over there!"
한국말로 했어야 했다. 다음 시음을 위해 '오번 제임스 말벡'을 디켄터에 따르던 남자의 얼굴이 붉은 포도주 빛깔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다.
테이스팅룸 구석에서 하드커버 커다란 책을 들고 온 남자는 무질서하게 늘어선 와인잔 사이에 그걸 툭 내려놓았다.
'나파밸리 와이너리의 개'
얼핏 보기에 어느 최상위 직업전문학교의 졸업앨범 같았다. 달리기는 어땠고, 용맹함은 어땠고.., 사진 한 장과 추억의 댓글 몇 줄로 그 모든 걸 담아낼 수는 없어도, '이 사람들 진심이었구나'..
아메리칸 불리 그 녀석의 머리를 멋쩍게 쓰다듬었다. 큰 용기가 필요한 돌발 행동이었다. 녀석은 꼼작 않고 땡그란 눈만 끔뻑거렸다.
"제가 떡하니 서 있으면 아무도 몰래 들어오지 못해요. 가끔은 잘 안 보이는 데 드러누워서 사람들이 불러도 못 들은 척을 해요."
다섯 살 옐로 랩의 오만한 게으름이 그랬던 반면, 열 살 래브라도 믹스견의 사연은 이랬다.
"저는 너구리, 다람쥐, 칠면조, 사슴 쫓는 걸 좋아해요. 걔네들 다 잡아야죠. 아니, 잡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관절염이 있어서..."
아홉 살 콜리 믹스는 밤새 벌레를 쫓는 일을 하다 무릎인대를 여러 번 다쳤고, 여섯 살 독일 셰퍼드 시라는 포도가 먹고 싶은데도 못 먹게 한다고 투덜대기도 하고, 몇 년 전만 해도 자기에게 일을 가르치던 스승 개는 이제는 열다섯 살이 되어 잘 보지도 잘 듣지도 못한다며 우울해하기도 하였다.
와인 테이스팅 손님 곁에서 치즈 얻어먹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케언 테리어 캘빈과 요크셔테리어 코디는 "사슴, 다람쥐, 새들에게 한 번 물어봐요. 우리가 그저 조그맣다고만 생각하는지.."라며 우쭐대었다.
평정심을 되찾은 오번 제임스의 남자는 50불에 세 잔 테이스팅의 막을 내렸고, 와인잔에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맡는 자세는 영 잘못된 것이라는, 좀 더 멀리 잔을 두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되돌아 걷는 길에 와인 두 병을 손에 들었다. 그게 말이지.. 눈가 주름을 걱정하던, 쌈짓돈이었는데. 아무래도 아메리칸 불리 그 녀석 탓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딘 보름도 하영 불엄져'는 제주도 방언으로 '여기는 바람도 많이 부네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파밸리의 대다수 와이너리는 농지 보호를 위해 웨딩 이벤트를 열지 않는 것으로 자체 규약을 맺었다. 다만, 역사가 오랜 몇몇 와이너리는 예외로 두었다.
***오번 제임스(Auburn James) 와이너리는 2024년 말에 폐업하였다.
표지사진이 케언 테리어 캘빈과 요크셔테리어 코디이다.(@janinelat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