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밤
"사람들은 어디서나 고독할 수 있다. 지하철에 타고서도, 길을 걷다가도, 사막을 건널 때에도.."
여름이 무척이나 길었다. 지루한 것들은 대체로 끈질긴 편이었다. 을지로 3가 역 3번 출구 계단을 걸어올라 지상으로 나섰다. 자동차 경적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 찌이익 긁는 소리, 특별할 게 없는 도시의 소음이 새삼 짜증스러워 검은색 면 티셔츠의 눅눅한 밑자락을 잡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댔다.
'힙'한 것도 한물갔다지만, 공사장 가림막과 번창한 술집 사이에 놓인 을지로 골목은 여전히 매캐한 빛으로 뿌옇고 모래처럼 거칠었다. 대낮엔 볼 품 없을 폐쇄적인 이 공간에 밤을 쫓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흡사 수백만 명 대도시인의 채집 표본 같았다. 빨강 파랑 강렬한 대조의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과 그 위의 축축한 맥주잔 사이를 비집고 눅눅한 밤이 흐르고 날 선 도시+사람의 소리도 파상적으로 흘렀다. 노가리와 닭튀김, 그걸 주워 먹는 사람들의 노릿한 향취가 그 사이를 또 날아다녔다.
다들 어디에서 왔는지, 왜 밤의 거리로 나왔는지, 이곳 풍경은 대도시적 고독의 표본 같았다. 검푸른 밤의 색이 확연해지고 인근 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고독해 보일 때쯤이면, 누가 먼저, 누가 나중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애써 무관심해하였다.
"고독한 사람들, 그들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고독한 사람들, 그들 모두 어디에 머무는 것일까?"*
밤+사람의 내부로 너무 빨리 빨려 들지 않으려 주위를 잠시 서성거렸다. 한 귀퉁이에서 친구들을 찾았다. 척지고 살았다고 할 것까진 없어도, 무심했던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연락이 닿은 것도 놀랄 일인데, 아직도 고등학생 적 얄궂은 얼굴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헤이 요, 오랜만!" 힙한 인사 뒤에 몸을 숨겨 나도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강남의 여중 국어선생인 놈은 그 직업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였다. 메신저 맞춤법도 엉망이고 가끔은 비속어도 썼다. 학부모 민원은 없는지 물어볼 것까지는 아니었다. 다른 한 놈은 용접 일을 끝내고 나왔단다. 이해는 어려웠지만, 제 스스로 벌이가 괜찮다니 두 번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배가 그리 튀어나와서 자세가 제대로 나오겠냐는 의문은 어쩔 수가 없었다. 또 다른 녀석은 늦둥이 딸내미가 자기를 본 체 만 체 한다며 선생 놈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야, 야, 원래 다 그래, 인마" 그걸로 끝이었다. 한 놈이 더 있어야 했는데, 오래전에 죽었다. "나? 별 수 있겠냐? 회사 계속 다니는 거지 뭐."
모두들 "달라지겠다'는 생각에 전념하며 여태껏 살아왔을 터였다. 그 녀석들 반 평생 중 고작 몇 년 밖에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보기엔 근본적으로 변치 않은 부분이 더 많아 보였다.
시간을 빠르게 거슬러 올랐다. 순진하다 믿던 도덕 선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던 이야기며, '게슈타포' 사감 눈을 피해 야자 땡땡이를 치던 이야기며, 아버지의 인삼 담금주를 거덜 내던 이야기며, 미팅이 망했다고 서로를 탓하던 이야기며.. 각자 가슴 한쪽의 고독한 아카이브(Archive) 속에서 잊힌 듯 잊히지 않은 에피소드적 순간들을 잘도 찾아내었다. 누구는 신문사 편집장이고, 누구는 CEO가 되었고, 또 누구는 동창에게 처절한 사기를 당해 이혼까지 했다라지.. 각자 아는 그런 얘기는 한 모금의 술에도 금방 녹아내리는 가치 없는 존재였다.
옛 기억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게 아니었다. 도시+밤의 독특한 향취가 맥주잔 속으로 똑 떨어질 때, 노가리 하나 집어 힘껏 물어뜯을 때, 하나씩의 기억을, 필연적으로, 끈질기게, 쏟아내었다. 젓가락을 연신 바닥에 떨어뜨리고 물 잔을 엎지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다들 거나하게 취해가고 있었다.
"고독에 머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였다."**
각자가 기억하는 에피소드의 종류는 조금씩 달랐다. 퍼즐 조각처럼 기억이 맞춰질 때면 옛 우정이 다시 시작되고, 옛 농담도 다시 살아났다. 까맣게 잊혔던 오래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느새 무지개의 양 끝에서 서로 닿아있었다.
느닷없이 끊어내고 다시 들이치는 식의 대화는 밤을 지새운들 끝이 날 계제는 아니었다. 한 놈, 그다음 놈, 담배를 피우겠다고 일어서며 똑같이 비틀거렸다. "얼마나 취했어? 언제 들어올 거야?" 핸드폰 너머의 날 선 소리에 한 놈씩 차례대로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골목을 돌고 돌아 마지막 술집을 나섰다. 대리 기사를 부르는 놈, 축 처진 어깨를 실룩거리며 역 쪽으로 걸어가는 놈, 당최 뭔 소린지 알아듣기 힘든 인사를 뒤로 하고 택시에 올랐다. "기ㅅ샤님, 져~쪽으로.." 택시가 꿀렁일 때마다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뒤로 깊숙이 기대었다. "띵" 누군가 내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몇 시간 만인지 몰랐다. 술에 취한 여름밤의 기대 없던 '좋아요'는, 필연적으로, 고독의 암시였다.
과거는 분명 현재 보다 강렬하였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결코 바뀌지 않을 유일한 영역이었다. 그곳을 벗어난 지 불과 몇십 분만에 열일곱열여덟 시절은 고독의 암시 속으로 사라져 갔다. 결국 난 변한 게 없었다.
소년은 청년으로- 청년은 다시 아저씨로- 시간의 정리정돈이 필요했던 것일까.
술에 취한 도시의 여름밤, 난데없이, '나이트호크'***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우리들의 과거 놀음은, 결국, 고독한 아저씨들의 구리기만 한 이야기였을까.
"모래를 한 움큼 움켜 잡았다. 손바닥을 완만하게 펼쳐 느슨하게 쥐었다. 모래는 대체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모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약간만을 붙들 수 있었다."****
택시는 엔진소리를 내며 도시를 헤집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창 밖 풍경이 차츰 익숙해져 갔다. 여전히 불이 켜진 아파트의 어떤 창문들. 시간이 거기에 고인 듯하였다. 눈을 감았다.
거대한 사막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 목젖에 모래알이 박혔다. 사막은 끔찍한 힘으로 나를 옭매었다. 발버둥 칠수록 몸은 점점 더 모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막에선 시간이 무서우리만큼 빠르게 흘렀다. 바로 그때였다. 잿빛 날개를 가진 갈매기 한 마리가 사막 위로 날아올랐다. 뜨거운 대기를 가르며 갈매기가 날았다. 너무도 선명한 광경이었다.
술에 취한 도시의 여름밤 속으로 예상치 못한 다정함이 차올랐다. 두 아들이 보였고, 아이들 엄마도 보였다. 수십 년이 또 흘러도 친구들은 여전히 열일곱열여덟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순간이 다정했으면 좋겠다. 너무 꽉 움켜쥐려고 발버둥 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주 달려오는 택시들의 전조등이 같은 리듬으로, 빠르게, 필연적으로, 삶의 힘처럼, 운명처럼, 희뿌연 빛을 쏘아대었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깊은 밤 잠 못 든 아이들 엄마는 여전히 숨이 차다. "어디쯤인데? 집은 찾아올 수 있겠어? 정문 앞에 나가있어?"
*"All the lonely people / Where do they all come from? / All the lonely people / Where do they all belong?" 비틀스의 '엘리너 리그비'(Eleanor Rigby) 노랫말 중에서
**올리비아 랭(Olivia Laing)의 외로운 도시(The Lonely City) 중에서
***화가(에드워드 호퍼)는 '나이트호크' 그림을 두고, "Unconsciously, probably, I was painting the loneliness of a large city" (무의식적으로, 아마도, 나는 큰 도시의 고독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칼릴 제이미슨(Kaleel Jamison)의 '니블(Nibble) 이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