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터와 프리다.. 그리고 다시 가을

가을의 단상

by 블루밍드림

스웨터


목이 따가운가 싶더니 늦은 밤 기침을 토해낸다. 이마가 뜨겁진 않으니 코로나는 아니겠고, 급성인후염 아니면 흔한 감기겠거니. 머그잔에 끓인 물을 붓고 레몬청 두어 스푼을 넣어 저은 후 하릴없이 침대 머리에 기대앉는다. 내일 춥겠지?... 잔을 내려놓고, 옷장을 열어젖히고, 서랍을 뒤적인다. 머릿속은 아마도 두툼한 밧줄 무늬 아란스웨터*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풍 무늬 스웨터일지도. 스웨터를 새로 하나 사야 하나? 스웨터가 잘 어울리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목울대까지 차오른다. 그 온기, 그 색채, 그 냄새까지도. 또다시, 가을이 지나가나 보다. 가을은 늘 감기를 앓는 것처럼 내 안으로 스며든다.


지난가을


미드나잇 오일을 켠다. 흔들리는 불빛과 저항하는 어둠이 서로를 삼킨다. 망상이 깃드는 심연이 열린다. 창밖에는 별이 빛날 거고, 이방에는 내 불빛이 가득 빛난다. 가을밤의 생각은, 마치 우로보로스** 괴수처럼, 스스로를 잡아먹고 재생하기를 순환한다. 밤새도록 내 모든 가을의 껍질을 벗겨 낼 태세다.


가을을 잠그고

슬픔을 잠그고

지난 사랑의 말도 잠그고

가슴속 밑바닥으로 흩어진 절박한 메모의 파편들을 줍는다. 마치 꿈처럼


램프 불빛의 궤도를 따라 밤이 깊어간다. 미련을 쥔 듯 놓을 줄 모르는 핸드폰에서, 운명처럼, "Ya no estas mas a mi lado corazon.."*** — 당신은 더 이상 내 곁에 있질 않네요, 내 사랑 — 지나간 가을의 애꿎은 선율이 불빛 그을음을 타고 흐른다.


프리다


깊은 밤중에 침묵의 그림자처럼 옛 가을을 본다. 에스파뇰 노래 탓일까. 가을의 초상 속에서 나는 어쩐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를 떠올린다.


멕시코시티의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뮤지엄 앞에서.. 노점상들은 화가의 작품들을 싸구려 쿠션과 에코백에 담고선 손님들이 매혹되기를 기다렸다.


어느 투명한 가을날, 그녀가 나고 죽은 집, 그 푸른 벽 앞 긴 줄에 나도 섰다. 화사한 햇살이 허접한 오마주의 노점 수비니어에 부딪히더니 서로를 씻어내며 빛을 내었다.


프리다 칼로는.. 여섯 살에 소아마비를 앓았고, 열여덟에는 교통사고로 온몸이 부서졌다. 서른 번 넘는 수술을 받으며 천장에 거울을 매달고 병상에 누워 자화상을 그렸다. 스물한 살 차이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세 번째 신부가 되었지만, 처제와도 놀아난 지독한 바람둥이 남편에 대한 사랑과 증오로 온몸이 또다시 부서져야 했다. 죽기 일 년 전에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냈다.


그러고 보면 가을도 프리다도 서로를 무척 닮았다.


프리다? 고통과 사랑, 증오와 욕망이 뒤엉킨 운명을, 화려한 색으로 바꾸고, 날카로운 선으로 붙잡고,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우로보로스 괴수처럼, 그녀 스스로 찢긴 육체를, 해진 영혼을 반복 재생하였다. — "나는 부서진 것이 아니라, 다시 조립된 나 자신이다."


가을은 처연하다. 지나는 바람, 수그러든 햇빛, 바스락 소리 — 프리다가 운명을 조립하듯, 가을은 사라지며 자신을 증명한다.


새벽이 기억을 음습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잃고서야 비로소 살 수 있는 것일까. 프리다의 그림들이 기억난다. 수박이 있는 정물화에다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를 적어놓았지. 죽기 8일 전에 말이야. 그것이 내 대답이라 생각하련다.


그리고 다시 가을


지금 10월 말, 시인의 말마따나 내가 사랑하는 고요한 우울함, 창가에 흐르는 차가운 숨결, 오렌지색, 금색, 바삭바삭한 냄새, 보라색 꽃향유, 커피 한잔, 내가 있는 풍경, 내가 없을 풍경, 바람, 살거나 죽듯이, 오르거나 가라앉듯이. 나뭇잎이 떨어진다, 주황빛, 핏빛, 바삭바삭한 부서진 잎들 — 지금 가을의 끝자락을 산다.


가평 축령산 잣나무 숲길에 가을이 들었다


가을을 낭비할 수는 없다.


날이 밝아 교외로 나간다. 잣나무 숲길을 걷는다. 머리 위의 나뭇가지들은 바짝 마른 빗물을 떨군다. 바람이 불고, 풀잎이 눕고, 나뭇잎이 떨어진다.

빌어먹을 속박

지나온 길

지나갈 길

사랑했던 나의 미소


가을은 나에게 놓아주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그 모든 움직임에 나를 맡긴 채 미끄러지듯 가을을 걷는다.


가을은 그래서 어쩌면 프리다의 초상 속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란 스웨터: 아일랜드 아란(Aran) 제도 어부들이 방수와 보온을 위해 입던 양모 스웨터로 전 세계적으로 전통 패션의 상징이다. 꽈배기, 다이아몬드 등 무늬가 독특한 이유는 바다에 빠져 죽은 어부들의 얼굴이 상해서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무늬를 보고 남편을 찾아내기 위한 아내들의 슬픔이라고 한다.

**우로보로스: 그리스 신화의 뱀의 형상을 한 괴수. 자신의 꼬리부터 먹어치우는 동시에 재생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한다. 파괴하여 창조하고 창조하여 파괴하며 죽음과 삶의 무한하고 영원한 순환을 상징한다.

***Historia De Un Amor (이스토리아 데 운 아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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