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감정은 바람 부는 하늘의 구름처럼 오고 간다. 의식적인 호흡은 나를 멈추는 닻과 같다."*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오가는 크루즈선이 Pier 41을 느긋하게 드나들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그랬던 추억처럼, 피셔맨스워프(Fisherman's Wharf)의 심장부를 배회하였다.
청회색 바다의 쏟아짐, 그리고 황홀함.
해 높은 무렵의 맑고 흐린 하늘, 그리고 아득함.
행여나 2월의 바람에 흩어질까.. 유채색과 무채색의 감각을 한데 끌어 모았다.
긴 호흡을 하였다. 바람 속으로, 감정의 닻을 깊이 내렸다.
고단한 감정의 샘플을 연민하였다.
그곳을 조금 벗어나자 파충류처럼 비늘이 돋은 커다란 철망이 나를 가로막았다. Pier 39의 한가로운 바다사자가 꺼억거리는 소리에 철망이 리드미컬하게 꿀렁거렸다. 뜻밖의 풍경이었다.
투명한 금속 비늘,
방부 처리된 알카트라즈**,
그리고, 나 사이에..
바다의 안개가 시야를 막고 감정을 어지럽혔다.
징그러운 비늘에.. 사랑의 자물쇠들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것들은 안개 두른 섬뜩한 알카트로즈를 배경으로 쓸데없는 미스터리가 되었다.
우리 여기 있었어.
영원히 사랑해.
이니셜을 그려 넣고, 하트를 그려 넣고,
우리 둘을 떼어놓지 마.
세상에 남길 기억의 제스처, 감정의 샘플.
바다를 나는 바람 탓일까. 자물쇠와 열쇠처럼 꼭 들어맞았을 키스의 쇳덩이에 거친 녹이 슬었다.
오후의 햇살은 간간이 어깨에 내려앉았고, 하늘을 낮게 나는 갈매기들은 남의 사연에 간섭하지 말라는 듯이 포악한 날갯짓을 하였다.
미스터리한 감정에 스민 기억이 바람을 타고 다가왔다.
나 자신 최고의 버전이었다.
"시를 적었어."
절정에 오른 구애의 시절에 종종 그녀에게 시를 지어 부쳤다. 신중하게 고른 단어와 허튼소리를 섞어가며 사랑에 불타오르는 즉흥 교향곡을 시로 옮겨 적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묻지도 않건만, 술에 취한 듯, 훌륭한 시가 아니라며 다음 것을 기약하였다. 그래도, 시들을 문방구로 가져가 자물쇠를 채우듯 코팅을 하였다.
그때는 알면서도 몰랐다. 나는 장미를 말했고, 그녀는 데이지 꽃이었다. 내가 폴라로이드 사진과 같을 때에도 그녀는 포토샵 사진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때가 우리 스스로 최고의 버전이었다. 그래서 가능하였다.
"내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아."
'사랑을 잃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도 별 것 아닌 척 나와는 상관없는 척할 수 있었다.
"꽃은 꽃 그대로가 아름답다. 당신 자신 그대로가 아름다움인데 왜 다른 사람에게서 당신을 찾으려고 하는가."*
최고 버전의 시절에는 삶의 단면 하나하나가 죄다 화려하기를 원했지만, 하나하나가 화려하기보다 순간순간이 잘 이어져야만 인생의 태피스트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나도 일하느라 피곤하거든."
보통의 집안일에도 '내'와 '네'가 나뉘고, 과거는 신뢰를 저버렸다.
"그걸 왜 신경을 써. 그냥 그러려니 하자고."
다른 이들과 갈등이라도 있을라치면 그녀를 방치하였다. 사랑의 시는 목적을 잃어 푸른 담쟁이덩굴이 기어올랐다.
"잔소리 좀 그만해."
천생 반응적인 냉소주의자라서 이래라저래라 조언이나 자기 계발서는 빈 껍데기 같은 말들로 치부하였다.
최고의 버전은 빠르게 낡은 것이 되고, 업그레이드도 힘들어져 갔다. 남들과의 비교가 늘어갔다.
계속 그런 식으로 해봐.
사랑은 열쇠 없는 자물쇠가 되었고, 가끔씩 가슴을 때렸다.
"갇혀버린 것 같아."
열쇠는 어디다 두었을까.
"계속 그런 식으로 해봐. 애들 다 크고 나면 그때는 어찌 될 건지."
냉정한 솔직함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고 싶었다.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수많은 사과를 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게 본질인 것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I come and I go. Catch me or I go Houdini."***
살다 보니, 삶의 초점이 어쩌면 감정의 맥락을 벗어나 일상적이고 저렴한 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갔을지도 몰랐다.
이어폰에서 이따금 흘러나오던 두아 리파의 '후디니' 그 노래는 새삼 섬뜩한 경고였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달콤해.
청산유수의 그 말을 실천은 하는 거야?
내겐 네 말을 믿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해.
혹시 그런 게 있다면 어서 내게 줘봐.
모든 사람이 다 알아.
날 붙잡아.
아니면 난 후디니처럼 사라질 거야.
돌이켜보면, 여태 살면서, 정작 내가 필요할 때 그녀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사랑의 자물쇠는 하나의 전체에서 두 개의 반개가 서로에게 딱 들어맞는 것. 그 본질적 정의를 기억해야 했다.
대 마술사 후디니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쇠를 잘 갖고 있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던 거였다.
셀프 러브락을 달았다.
크루즈선이 고동을 울리며 Pier 41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바다는 그 옛날 아주 멋졌던 시와 아름다웠던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시 보여주었다. 과거에 속한 그 바닷가. 과잉이 된 감정이 어디로 튈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사랑의 자물쇠.. 어쩌면 비현실적인 세계를 스스로 만들고 또 스스로 실망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물쇠 하나 사줄게."
샌프란시스코 바닷가에서 조용히 다짐하였다.
"사랑의 자물쇠를 다시 채우자."
집에 있을 그녀에게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의 자물쇠는 당신 가슴에, 열쇠는 내 가슴에.. 잠긴 듯 풀린 듯 그런 자의식으로. 오래도록. 녹이 슬지도 않게.
짙은 안개가 다리를 엄습하였다. 안개가 가득 흘러가고 있었다. 알카트로즈는 거만한 안개의 그림자에 가려 말이 없었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떠나려면 여러 날인데도, 그리움이 안개처럼 머무는 샌프란시스코를 갈망하였다. 그 사실을 암시하는 미묘한 단서처럼 샌프란시스코의 오후는 조용한 흐름이었다.
바람은 언덕을 내려오고, 케이블카는 언덕을 올랐다. 도시는 천천히 시간을 풀어내고, 낭만의 흔들림 위에서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
노을이 바다에 드리울 시간이면, 오라클파크 어디쯤의 선술집에 들었겠다. 그리고, 사랑했던 최고 버전의 그 사람들에게 술 한잔 건네고 있지는 않을까.
때마침, 케이블카가 코앞을 스쳐 지났다.
때마침, 집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들을 그리워하였다.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의 가르침 중에서
**알카트라즈(Alcatraz): 감옥의 섬이자 자유의 섬. 동명의 영화가 있듯이 'The Rock'으로도 불린다. 한때 미국에서 '교정할 수 없는' 범죄자들을 가두기 위한 최고 보안의 교도소였다.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의 실제 배경이다.
***두아 리파(Dua Lipa)의 노래 'Houdini'(후디니) 중에서. 마술사 해리 후디니(1874-1926)는 탈출 마술의 신드롬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마술사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