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은 슬로건, 구호, 스탠드업 코미디, 거리 예술 등을 통해 거대한 창조적 에너지를 뿜어냈다.”
2011년 1월,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폭정에 대한 저항이었다. 독재에 대한 뿌리 깊은 내성 그 사이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어떤 작은 틈이 생겨나더니 곧 거센 투쟁으로 커져갔다. 총에 맞아 죽어도, 질식해서 죽어도, 피를 먹고 자라난 18일간의 항쟁은 마침내 30년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하필이면 그 무렵이었다. 카이로행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던 때가. 어쩌지 못해 봄기운이 완연한 날을 기약하였다.
타흐리르 광장의 봄은 아주 짧았다.
유혈진압으로 기소된 무바라크 전 대통령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시위는 계속되었다. 길어지는 혼란은 독재에 대한 향수를 잉태하고, 탐욕의 군부가 그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2013년의 군부 쿠데타로 첫 민선 대통령이 쫓겨났고, 그 후로, 군부 출신 엘시시가 세 차례 연임의 장수 대통령이 되었다.
천 년이 넘은 도시에 십여 년 세월은 광장에 먼지가 조금 더 쌓이는 시간일 뿐이겠다만, 광장에 뿌려진 애꿎은 피는 플라스틱 장미꽃 한 송이조차 피워내지 못하였다.
현대 이집트와 고대 이집트의 차이를 구분 지을 필요가 있었다.
'아랍의 봄'*은 아주 짧았고, 독재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9월의 햇살 좋은 어느 날, 카이로행 이집트항공 탑승 트랩에 올라섰다.
카이로 상공에 가까워지며, 이집트는 네페르티티, 투탕카멘, 쿠푸의 대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이집트의 유물과 동의어가 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타흐리르 광장의 중심에 원형교차로가 놓였다. 파리 개선문을 몇 겹의 차들이 에워싸듯이 카이로의 차들은 람세스 2세 오벨리스크를 에워싸고 돌았다. 그 옛날 피의 증거는 파라오 시대 이집트의 영광으로 완벽하게 가려졌다.
택시가 광장을 유연하게 돌아 나와 인터콘티넨탈 호텔 앞에 멈추었다. 벨보이가 택시 문을 열었다. 다른 한 명은 트렁크에서 14인치 캐리어 두 개를 꺼내더니 재빠르게 로비로 들어갔다.
카이로는 웅장한 도시였다.
호텔방 창 너머로 태양은 높고 나일강은 도도하였다.
카스르 엘 닐 다리가 고대의 강을 가로질렀고, 187미터 높이로 우뚝 솟은 강 건너 카이로 타워가 조금은 기이하게 보였다.
창 밖으로 도시의 온갖 소음이 으르렁 거렸다. 가늠은 안되어도 2,300만 명 거대 도시의 위용에 걸맞은 데시벨이었다.
현대 이집트의 풍경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공항에서 호텔로 오던 길.. 신호등은 장식, 경적은 언어가 되던 거대한 불협화음의 리듬과는 확연한 엇박자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동요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따금 잿빛 새들이 미친 듯이 급강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카이로대학 출신의 청년은 언변이 뛰어났다.
외려 불편하다 싶을 정도로 편안했던 밤이 지나자 카이로의 아침은 나일강을 배경으로 무척 느긋하였다.
관광 가이드가 아침 일찍 로비에 도착하였다. 개별 여행은 엄두가 나지 않아 우리 가족만 데리고 다니는 기자(Giza) 네크로폴리스 패키지 투어 하나를 예약했었다. 멀리 왕가의 계곡과 아부 심벨 신전을 제외하면, 그것만으로도 이집트의 가치는 충분하다 싶었다.
삼십 대 초반쯤의 청년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집트의 모든 것에 대해 우쭐대었고, 집요하게 우리의 동의를 구하였다.
카이로에 온 이유는 명백하였다.
기자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피라미드가 위용을 드러내기 전까지 어느 거리에서도 고대 이집트의 상징은 없었다. 이슬람적 정체성이 더 뚜렷해 보였다.
청년은 허름한 피자헛 앞에 차를 세웠다. 두어 평 남짓 발코니 한쪽 테이블에 둘러앉아 피자 한 조각씩 입에 물었다. 4천 년 피라미드와 4분 피자의 즉흥 콘트라스트. 피라미드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해서 그곳에서 끝이 난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한 현존물인 기자의 대피라미드(쿠푸의 파라미드), 카프레 피라미드 그리고 멘카우레 피라미드.
개성이 뚜렷한 돌덩이마다 실수의 사연 하나쯤은 숨기고 있어 보여도..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가장 오랜 '회고 절정'이 아니겠는가.
천천히 쇠태 하는 위대함.
내 뒤를 따라 이곳을 찾아올 수백수천의 연속적 세대.
내 삶도 결국 4천 년 전으로 후퇴하리란 덧없음.
그런 무의식적 상념이야말로 카이로를 찾아온 명백한 이유가 아니었을지.
사막에 바람이 스치불자 피라미드 곁의 삐쩍 마른 낙타들은 고약한 성질머리를 숨긴 채 일제히 끄으응 소리를 내었다.
청년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고령인데도 낙타 타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꼬드김을 하였다.
소리에 반응하여 낙타 등에 올랐다.
능숙하게 안내하고 온갖 기괴한 포즈의 사진을 찍어주는 의도된 서비스는 박시시(팁)로 대응하여야 했다.
피라미드 곁을 맴도는 낙타는 고대 이집트의 영광과 불가분 관계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별빛이 없어도 낙타는 겅중겅중 멀리도 걸었다.
낙타를 멈추어 풍경의 가장자리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지나간 날들 속에 존재했던 것들, 내 엄숙한 눈동자에 비치는 것들, 그때의 시간 그리고 지금의 시간. 이것들이 엮어낸 불투명한 선들이 적막한 고대와 소란스러운 현대를 또렷이 구분 지었다.
멀리 피라미드의 진지하고, 슬프고, 인내하는 표정은 아마도 사막 아지랑이 탓이려니 여겼다.
모진 세월, 깨지고, 뜯기고, 홀로 웅크려 앉았어도, 스핑크스('살아있는 형상')는 위풍당당함만은 잃지 않았다. 창조자가 뭐라고 불렀는지도 알지 못하고 모든 게 수수께끼인 '살아있는 형상'은 현대 이집트의 난해하고 심란한 세태 쪽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스핑크스와 고요히 마주하면 심판의 그날에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청년이 알려주었다. 차마 그 말에는 동의를 할 수 없었다.
현대 이집트의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기로 하였다.
스핑크스 앞 점방들. 생수를 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도로는 유한한데 차들은 순식간에 머리를 들이밀며 2, 3, 4, 4.5 차선으로 무한 증식을 하였다. 매초마다 빵빵대는 경적 소리. 유기적 합의에 의한 조직적 혼돈.
지붕 위로 철근이 삐죽 솟은 흙빛 벽돌집들. 길거리 개들이 컹컹 짖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지붕 위로 집을 더 지어 올립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붕 위로 방을 하나 더 만들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다 자라도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지요. 지붕 위로 삐죽 튀어나온 철근의 이유입니다."
청년의 자부심. 이집트 파운드의 허접한 가치. 대가족의 전통. 카이로의 허술한 풍경은 합리적이었다.
거친 풍경 속에 늦여름 장미가 피었다.
나일강을 따라 고급 호텔들이 줄을 지었다.
청년은 우리를 내려주고는 저녁시간 손님을 찾아 떠나갔다. 산들바람과 약간의 안도감으로 카이로의 오후 시간이 느긋하였다.
카이로와의 이별은 달콤하였다.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카이로는 독특한 도시였다.
엄청난 자부심의 고대 유산, 혼돈의 도시 풍경, 거기에 아주 잘 어울리는 색채.. 그리고, 군부 대통령의 97%, 97%, 90% 삼세번 당선 득표율...
인터콘티넨탈 호텔 2층 이탈리언 레스토랑 창가에 앉았다. 수다스러운 아이들 옆에서 아빠는 큰 별 하나 가슴에 품은 이집트 맥주 '스텔라'를 홀짝였다.
저 멀리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을 방향으로 수백만 개의 불빛이 낮게 깔렸다. 화려한 조명을 밝힌 나일강 유람선에선 지금 한창 벨리댄스의 향연이겠다.
늦은 저녁 나일강이 흐르는 카이로의 풍경은 고대 이집트를 완벽하게 지웠다.
다음날, 정오가 가까워져 택시 한 대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도심 거리를 지나 공항으로 향하였다. 햇살이 흙빛 건물 외벽과 철제 난간과 모스크의 첨탑 위로 빛을 내었다.
카이로 거친 길 위에 붉은 장미가 피었다.
사막에서 부는 바람은 거칠고, 풍경은 메말라서, 꽃은 스스로 아름답기를 잊었다. 그러나, 망각 속에서도, 꽃은 여전히 붉고 아름다우며, 바람에 실린 향기는 저만치 흘러갈 것이다. 언젠가 그 꽃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깨달을 것이다.
※표지사진: 2011년 1월 이집트 혁명 당시 시위 진압 경찰에게 '모성의 호소'로 입을 맞추는 여인. 당시 900명 가까운 시민이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하였다. @Al Jazeera
*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의 한 과일 행상이 경찰 단속에 반발해 분신한 일을 계기로 중동 및 북아프리카로 확산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에서 정권 교체를 이뤄냈지만, 대부분 국가가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지며 전반적으로 실패한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