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봄 여름, 그리고 선재길

마음에서 비롯되다

by 블루밍드림

겨울


자작나무 하얀 그늘이 고요하길래, 서울을 떠나왔다.


바람결이 참 수상하더니 기어이 포슬눈이 흩날렸다. 몇 걸음을 더 걸었을까, 쉬엄쉬엄 발길에도 진눈깨비가 툭툭 부딪혔다. 후드득.. 싸늘하고 느릿한 속삭임, 오대산 선재길을 걷는 시작이었다.



돌부리에 차일까 바위에 미끄러질까.. 오롯이 쓰이는 내 마음조차 우중 산책의 기막힌 선문답(禪問答)이었다. 멀리 선재길을 찾아온 이유가 마침 딱 그러하였다.


내가 만약 속세를 떠나 행자의 신세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겨울의 월정사를 떠나 더 깊은 겨울 속 상원사를 향하여 숲을 지나고 내를 건넜다. 지루할 법도 한 세 시간 기나긴 길에 큰스님 뒤를 쫓아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답할 건지, 서릿발처럼 새하얗게, 소심한 고심을 태웠겠다.



비가 애잔히도 땅을 적시건만 젖은 발 야단도 않고 아무 말 없이 가시는 스님.. 산처럼 묵묵하였다.


"날도 차고 발도 시리니 빗길 걷기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비가 언제 불편하다 한 적이 있더냐?"


열셋열넷 소년은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 수사회로 전화를 걸었다. 수도사 되는 길이 생각보다 얍삽하지 않음을 알고 적잖이 실망하였다. 우중의 선재길에서 난데없이 앳되었던 옛 고()를 생각해 내었다. 뜬금없는 기억이었다.


아치처럼 늘어진 나뭇가지에 빗물이 멈추었다가 우산 꼭지에 부딪혀 우수수 무너졌다. 새소리는 빗소리에 묻히고, 아름드리 전나무가 무거운 향기를 뿜었더니 바람도 그만 축 늘어지고 말았다.




벚꽃은 지고, 봄인데도 봄이 그립길래, 서울을 떠나왔다.


진부역(오대산역)으로 가는 고속열차가 예정보다 늦게 서울역을 출발하였다. 정차역마다 연착의 시간이 길어졌다. 우리 말고도 조바심이 많은 것인지 열차 지연 사과 방송이 흘러나왔다. 플랫폼에 내려서자 스물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월정사행 8시 55분 버스를 향해 내달음질을 쳤다.



선재(善財) 동자는 쉰셋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했고, 난, 그래서일까, 오대(五臺)**의 맥이 아래로 곧게 뻗친 선재의 그 길을 한 번은 더 걸어보려 하였다.


영화(榮華)는 어디 가고 주춧돌만 남았다. 그게 그즈음의 내 가슴이었다.


만월교를 건너자 월정사 그늘 길게 늘어진 그곳은 온새로미 봄날이었다. '잘 되지 못한' 응어리는 여전히 가슴속 겨울을 살았어도, 그곳 세상은 온통 눈부심으로 가득하였다.


숲으로 난 길, 냇가와 나란한 길, 개울을 건너는 길.., 발품으로 이어진 천년의 길. 지난겨울 시답잖던 내 시름의 흔적마저 이미 그 길의 증명이었다.


도시에선 스러져버린 벚꽃이 그 길엔 흐드러졌다. 냇 가운데로 쓰러진 늙은 벚나무는 꽃잎을 부여잡고 애써 놓지 않았다.



들꽃, 풀, 벌레, 산새, 심지어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조차 서로서로 선문답을 주고받음에 틀림없었다. 나도 거기에 있었다.


"저만 왜 이리 답답하고 일이 안 풀릴까요?"

"봄꽃은 봄에 피고 가을 열매는 가을에 맺는 법이니라."



그 길 위에서.. 밀라노 근교 파비아 수도원(Certosa di Pavia)의 어느 수도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어쩌면 필연이었겠다.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수도사는 기꺼이 성호를 그었고 우리를 축복해 주었다. 그때의 위로가 오늘에 와 늙어 죽은 벚나무를 떠나지 않던 마지막 꽃잎들처럼 화사한 빛을 뿜었다. 먼 길 온 보람이라 여겼다.


상원사 문수전을 돌아 나오다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 가는 길을 보았다. 날은 화창하고 시간은 부족함이 없으니 그냥 한번 가보자꾸나 싶었다.


'적멸보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등에 짊어지고.. 산길을 올랐다.



여름


봄이 오면 나아질까 기다리고 기다렸어도 내 가슴이 사는 형편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거만하던 나뭇잎이 하나 둘 흔들리기 시작하길래, 펄펄 끓던 여름이 기운을 잃어가길래, 또다시 서울을 떠나왔다. 고속열차는 청량리역을 정시에 출발하였다.


8시 55분 진부역을 정시에 출발한 버스는 목청 좋은 아낙네들을 태워가며 내려가며 아침 햇살 가득 내린 양파밭 대파밭을 스쳐 지났다. 40여분이 지나 상원사에 도착하였다.



산은 높고 숲은 깊고 냇물은 맑고.. 바람이 느릿하게 내 가슴에 들어오더니 잠시 쉬어갔다. 발걸음이 느려지니 폐부 깊숙이 하늘 한 모금을 따서 마셨다.


겨울은 처연한 게 노승의 마음만 같고 봄은 또 철부지 동자와 같더니만, 그 여름은 파르라니 머리를 처음 민 행자의 마음만 같았다.



"이 먼 길 걷기가 고되지 않으십니까?"

"한 발을 내딛을 뿐이다."


무엇이 있었을까

무엇이 사라졌을까

누가 미운 것일까..


무심한 사이에 바람이 불었을까. 들꽃이 흔들리고, 나비가 날고, 다람쥐가 뛰어가고, 새가 울었다.


'걷다 보면 고()를 버리게 될까? 그래, 견디는 힘이라도 구해보리라.'


월정사 기도발이 뛰어나니 꼭 적광전(寂光殿)에 들러 절을 해보라던 권유의 말들이 늦여름 한낮 햇볕에 느긋하게 달아올랐다.



적멸보궁


지난봄.. 상원사에서도 위로 더 위로 가파르게만 오르던 그 길은 무척이나 고단하였다. 두 번이야 오겠나 싶던 적멸보궁***이었다.


중대 사자암


한 계단 두 계단 고단한 천 계단을 또다시 오르자니, 웬만한 시름엔 마음 쓸 줄 모르던 내가, 속세와 멀어지는 깊은 산길의 고요함에 그만..


북대·남대·동대·서대가 오목하게 원을 그려 연꽃잎을 펼쳤으니 그 가운데 중대(中臺)가 들어앉았다. 마침내 층층 누각 절멸보궁 수호암자 중대 사자암에 이르었다. 서두른 샘물 한 바가지에 길었던 고단함을 잠시 달래었다.


중대 사자암 비로전


햇살이 적막하니

나비는 꽃에 앉아 바람을 쉬어갈까

푸르른 여백 속에 빠졌으니

차마 떠나지 못하리라


"내가 나의 미신이자 부적이오, 내가 나의 질문이자 대답이다."


어느 타로 마스터의 이 쓰디쓴 말을 잘 알면서도, 순간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타로를 찾아갔다. 따져보니 한 계절에 한번 꼴이었다. 좋은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한 번은 도를 닦는 게 낫겠다 하고, 또 한 번은 수비학 9번이라며 세상 살기 힘들겠단다.


산을 보고 허공을 보다가.. 다시 산길을 올랐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향하는 그 길은 끝없는.. 염불이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쉼 없이 들려왔다.


적멸보궁 법당은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저의 괴로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그러니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 괴로움을 헤아려 주소서.'


그렇게만 해도 된다 해서,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따라 외웠다.


지난봄의 세존진신탑묘(世尊眞身塔墓)


마침내 오대산 높은 자리 그곳 적멸보궁을 보았다. 지난겨울 빗줄기 마냥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차마 발 디디지 못할 법당에서 염불이 들려왔다.


법당을 뒤로 돌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묻힌 세존진신탑묘 앞에 섰더니, 꼿꼿이 정좌한 여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부처님의 마음은 범부중생(凡夫衆生)의 본래 마음이고, 중생이 보살이 되어 보살행을 펼칠 수 있는 보리마음이기도 하다.’


적멸보궁의 풍경 속에 선 이유만으로도 화엄(華嚴)의 세계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또한 먼 길 온 보람이었다.


비로봉에서 불어온 바람이 연등을 흔들었다. 그만 산을 내려가야 옳았다.


절간 문이 적막하니 집이 생각난 게야

계곡 물속에 꽃병 넣어 달을 뜨던 일도 이젠 그만이겠네

찔찔 울지 말고 잘 가려무나

이 늙은 중과 함께 할 이는 저 노을이 있지 않니


속세로 떠나는 동자가 나일지, 먼발치서 동자를 바라볼 노승이 나일지.. 알기가 어려웠다. 동자도 노승도 나도 모두 다 한 몸만 같았다.



내려가는 길이 길지 않을 터인데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맴돌았다. 무겁지 않게 잘게 잘라 사과를 보시하였더니, 집을 잊었는지, 내 지척에 한참을 머물렀다.



가을


만추의 선재길은 누구를 닮았을까? 큰스님, 행자, 아니면 동자?


가을은 한참을 비워 두기로 하였다. 먼 훗날, 다시 한번 선재길을 걷고 또다시 적멸보궁에 오른다면, 그때는 긴 선문답이 조금은 쉬워질까.. 궁금하였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몸이 죽고 마음이 죽는 것이다."

"몸이 죽고 마음도 죽으면 윤회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업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있는 까닭은 대체 무엇입니까?"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보리(無上菩提): 최상의 이상. 궁극적 깨달음

**오대(五臺):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염불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 그리고 그 가운데 중대 사자암, 이상 다섯 암자. 오대산 산세는 다섯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과 같다고 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궁전. '적멸'은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이며, 불꽃이 꺼져 고요한 상태 즉,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무명(無明): 진리를 알지 못하고 번뇌와 괴로움에 빠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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