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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08. 2024

프로방스 '알퐁스, 빈센트, 라벤더, 해바라기' ②

세계여행 에세이: 프랑스 프로방스 (2화)

"풍경은 나의 마음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되고, 생각하며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나는 나의 그림과 일체가 된다. 우리는 무지갯빛 혼돈 속에서 하나가 된다."... 폴 세잔




보랏빛 라벤더 사이로, 청록색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샛노란 해바라기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을 보이는 돌집들. 프랑스 사람들은 수백 년을 같은 스타일로 그 자리를 지켜온 프로방스의 시골 농가(農家)를 마스(Mas)라고 부른다. 마스가 없는 프로방스 풍경은 왠지 쓸쓸해 보일지도 모른다.


방투 산(Mont Bentoux)이 멀리 바라보이는 들판 어딘가의 마스에서 밤을 기다렸어야 했다. 7월의 프로방스는 준비 늦은 여행객에게 기꺼이 내어 줄 마스가 없다. 아쉬움이 쌓이는 만큼 여행은 성숙해진다.


마스 (Free Image)





루시용(Roussillon), 오후 2시 40분의 태양


고르드를 떠난 지 10 여분 남짓. 루시용을 만나자 난데없이 교양필수 미학(美學) 수업이 시작된다. 강사는 오후 2시 40분 눈이 부셔 감히 올려다볼 엄두도 나지 않는 태양이요, 프로방스를 가장 프로방스답게 하는 색채와 빛깔의 지배자다.



색이 아니다. 빛깔이다.


루시용은 거대한 황토 덩어리 절벽을 꽃대삼아 고고하게 앉았다. 프랑스 황토는 오크르(Ocre)라 부르고, 영어로 오커(Ochre)가 되었다. 오커색, 인간을 지배한 최초의 색이다.  


오커 골드, 브라운 오커, 옐로 오커, 레드 오커, 여성들 파운데이션 색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루시용이 한낮의 태양을 만나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빛깔로 반짝인다.


쉬운 표현으로 색채의 향연이다. 이를 본 여행자들은 말한다, 황금빛과 핏빛으로 붉게 타오른다고. 바로 프로방스다.


출처: sworld.co.uk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마다 햇살은 빠짐없이 찾아든다. 군데군데 숨겨놓은 작은 계단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찾으러 다녀본다. 오후 한때 햇빛과의 유쾌한 숨바꼭질 놀이다.


볼 때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노랗게 물든 걸까, 아니면 빨갛게 빛나고 있는 것일까. 제각각, 제멋대로 염색된 오간디 실크를 몇 겹을 덧붙인 듯 루시용의 모든 벽은 태양이 빛나는 순간 균질하지 않은 빛깔로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는다.



녹색, 회색, 푸른색, 각양각색의 덧창들. 오래돼 낡은 장식들, 채송화, 맨드라미, 화사한 꽃들. 이러한 오브제가 한데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운 루시용 정물화를 그려낸다.



루시용의 여름은 그 빛깔 때문에라도 덥고 건조하다. 일 년 중 3백 일 이상 맑은 날씨. 프랑스 와인 산지 중 일조량이 가장 많단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아마도 지금 이 시간 와이너리에 앉아 시음하라고 내어준 와인 두서너 잔을 겉멋 잔뜩 든 채 홀짝거리고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미학 수업에서 배운 것을 정리해 본다. (태양x색)+빛=프로방스?


오후 2시 40분을 한참 지나도록 여전히 뜨거운 햇볕이 사람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한다. 아이들과 엄마는 고르드를 더, 난 이곳 루시용을 더 마음에 담고 다시 길을 떠난다.




길을 가다 잠시 멈추었다. 과수원 따라 난 길가에 과일을 벌여놓고 파는 아저씨를 발견해서다. 얼핏 보아도 인상 좋은 시골 농부다.


딱 이런 그림이다 (출처: Pinterest.co.kr)


노르웨이 송네 피오르드 길가에서 사 먹은 체리, 체코 프라하 변두리 길가에서 사 먹은 딸기의 맛을 기억해 본다. 올해 마지막으로 따냈다는 딸기와 복숭아와 살구를 샀다. (원래 딸기는 초여름 과일이라고 한다.)  달디 단 빨간 맛 그리고 노란 맛. 덤으로 얻은 프로방스의 기쁨이다.



세낭크 수도원(Abbaye de Senanque), '속세(俗世)'와 '수행(修行)'의 농밀한 공존


아찔한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라벤더, 그리고 속세 멀리 계곡 가운데 자리 잡은 거무튀튀한 중세 수도원. 대비되는 이 두 색깔이 위태로운 듯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보라색은 '회개'와 '속죄'를 나타낸다. 가톨릭 사제가 미사 때 입는 옷을 ‘전례복’이라고 하고, 미사 전례복 중에 겉옷으로 입는 것을 ‘제의(祭衣)'라고 하는데,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에,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한 미사 때 사제는 보라색 제의를 입는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


건조한 모래 땅과 척박한 돌 틈에서도 라벤더는 잘 자라나 짙은 보랏빛이 된다. 세낭크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라벤더를 직접 재배하고 양봉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속세로부터 여행자들이 몰려든다. 침묵의 수도원으로.


세낭크 수도원 회랑과 사제실 (출처: 세낭크 수도원 홈페이지)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채색 안료는 '오커(황토)'다. 보라색은 어떠한가. 중세까지 지중해 가시달팽이 분비액을 한 방울씩 모아 여러 날을 달인 후 햇빛에 말려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금단의 색이 보라색이었다. 코트 한 벌 염색하려면 3백만 마리의 가시달팽이가 필요했다고 한다. 보라색이 영어로 퍼플(Purple)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퍼플의 어원은 '빛의 순수함'이고, 그 옛날 사람들은 퍼플을 하늘이 내린 색이라고 했다. 고대에는 로마제국 황제에게, 중세에는 가톨릭 교회 고위 성직자에게 보라색이 허락되었다.


세낭크 수도원의 보랏빛 라벤더 작은 호수가 너울댄다.


라벤더 밭고랑을 따라 걷는 이들의 발걸음을 바쁘게 쫓아 보랏빛 향기가 계곡 위로 흩어진다.

 






라벤더를 시샘하여 땅으로 내려오던 해가 수백만 개 조각으로 흩뿌려져 세상을 뒤덮었다. 너울도 없는 노란 해바라기의 바다에 빠져 내가 해바라기인지 해바라기가 나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겠다.


루시용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아를(Arles)로 가는 길. 노란 해바라기가 바다를 이룬다. "러블리! 러블리"를 연신 외쳐대는 노신사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이 해바라기로 보인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해바라기와 나란히 서 있자니, 찰나의 순간, 어릴 적 울적할 때면 듣곤 하던 헨리 맨시니의 Loss of Love (소피아 로렌 주연의 고전영화 'Sunflower'의 주제곡) 애잔한 멜로디가 떠올라 노신사의 행복에 겨운 표정과 맞부딪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 순간 나도 행복하다.



이제, 프로방스에 흘려놓은 알퐁스 도데와 빈센트 반 고흐의 혼적을 쫓아 떠날 시간이다.




프로방스 최종화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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