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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Jul 23. 2024

5월의 블타바강은 굽이돌고 시간은 숨을 고른다

세계여행 에세이: 체코 체스키크룸로프

나의 청소년 시절은 대개는 꼬질꼬질한 데다 희뿌연 연무에 휘둘린 날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어디 늘 그러기만 했겠는가. 때로는 멋 부리는 것도 잘 알아서, 그럴 때면, "Once on a time, as old stories tell us, There was a Duke whose name was Theseus."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에 테세우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길고 긴 캔터베리 테일즈 대서사시를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체코를 기억하는 방법도 명백하게 그런 취미와 비슷하였다.


(누구는 '몰다우'라 부르는) 길고 긴 블타바(Vltava) 강은 프라하의 심장부를 꿰뚫으며,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에 발현하곤 하였다. 체코 흥망성쇠를 내려다보는 프라하의 높은 성 '비셰흐라트'를 추억하는 제1악장이 끝나자 비셰흐라트 곁을 떠나지 못하는 블타바강을 흠모하여 제2악장이 시작되고, 나는 그 낯선 나라 국뽕에 심취하곤 하였다.


카렐 히네크 마하의 대서사시 '5월'의 도입부를 몇 번이고 고쳐 읽고 또 고쳐 읽었다. 고작 스무다섯 해만 살다 죽어버린 비운의 시인이 남겨놓은 거룩하고 거룩한 낭만의 시구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한 번도 끝까지 읽지 못한 길고 긴 그 시.


늦은 저녁 - 5월의 첫날 -

저녁의 5월 - 사랑의 시간.

솔향기 그윽한 솔밭에서

호도애 울음소리 사랑으로 초대했다.

고요한 이끼 사랑을 노래하고,

꽃나무 사랑은 고통이라며 거짓을 말하고,

나이팅게일 장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장미는 자신의 사랑을 향기로 화답했다.

짙은 덤불로 병풍을 두른 잔잔한 호수는

숨겨 둔 마음의 고통을 물결에 실어 보내고,

빙 둘러 호수 둑은 제 품으로 호수를 껴안았다.

(Karel Hynek Mácha의 'Máj' 중에서. 세상을 뜨기 7개월 전에 발표하였다.)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어느 날, 나는 가족을 이끌고 체코 땅에 들었다. 블타바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우리는 남으로 향했다.




체스키크룸로프를 찾다


오스트리아와 이웃한 남(南)보헤미아는 블타바강의 시작점을 품었고, 블타바강은 그리 멀리 흐리지 못해 체스키크룸로프(Český Krumlov)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죄다 그랬다, 그곳은 예쁜 동화 같다고. 블타바 강의 동화 이야기에 호기심이 크게 동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일 게다.


해 저문 카를교 위에 서서 프라하에 찾아든 약간은 우울한 늦은 저녁과 눈부신 프라하성의 불빛과 그 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강의 검은 윤슬을 바라보며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제2악장의 선율을 기억해 본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보헤미안 풍()이란 것의 실체를 잘 몰랐다. 독일의 흔한 풍경과는 사뭇,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듯한 풍광에 취한 채, 프라하를 떠나 남으로 남으로 차를 달렸다.


하회(河回)에 멈춘 시간, 동화책을 펼쳐 읽다


사행(蛇行)의 블타바강은 체스키크룸로프를 휘감고 돌며 토사를 쌓고 쌓아 너른 벌 '크룸로프'를 이룬다. 강은 도도하건만, 블타바강을 거슬러 내려오니, 보헤미아('체스키') 하회마을에선 팔백 년 세월이 무색하게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온 듯하다. 중세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마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빈 땅에 잠깐 주차를 했을 뿐인데, 차바퀴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 적지 않은 과태료를 내게 된 터라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우중(雨中)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훼손되지 않은) 들뜬 마음으로 그제야 둘러보는 그곳은 파스텔 톤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듣던 말 그대로, 그저 어여쁘다.



프라하가 실로 고색창연하고 환상적인 곳이라는 세간의 평에 전혀 이의가 없다. 하지만, 어느 여행가의 말마따나 분명 프라하가 체코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중앙 광장에 바로 붙은 즐라티 안델 호텔이라는 곳에 일단 짐을 헤쳐 푼다.



재력을 망각한 플렉스 덕에 꼭대기층에 든다. 방 안의 또 다른 세상 다락방에 오르면 창이 활짝 열리고 박공지붕 사이로 동화책 페이지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악동들이 무지 좋아라 한다.


어릴 적 읽던 '소공녀' 책 속 세라의 다락방과 같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만 한 세라는 잠결에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잠에서 깬 세라 곁에는 예쁜 잠옷과 실내화가 놓여 있었고, 난로에서 장작이 타고 있었다. 게다가 하얀 식탁보가 덮인 탁자 위에 뜨끈한 수프와 샌드위치 등이 잔뜩 있었다.)



다락방의 기적을 서툰 재주로 머릿속에 옮겨 그리며 창밖을 바라본다. 피곤에 찌든 충혈된 눈을 통과하여 머릿속 가득 평화가 차오르는 순간 때마침 땡그랑땡그랑 오후 종이 울린다.


교향시, 랩소디의 웅장한 감동은 어디 가고 코흘리개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산 든 메리포핀스가 경사진 지붕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동화 속 착각에 순간순간 아찔해진다.


거리로 나서기 전, 호텔 창가에 앉아 따뜻한 음료를 마신다. 창 너머 크룸로프 성탑은 여전하다. 커피 향이 달콤하게 코끝을 간질인다.


수퍼칼리프라질리스틱익스피알리도셔스



마법을 통해 애니메이션 세계로 들어간 메리포핀스처럼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수퍼칼리프라질리스틱익스피알리도셔스)를 흥얼거리며 보슬비 내리는 거리로 나선다.


팔백 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한결같이, 동화 같은 절경을 내려다보는 호사에 빠진 (웅장하다 하기도 뭐 하고 화려하다 하기에도 뭐 한 그런 묘한 매력의) 크룸로프성을 시샘하다 보니, 발길은 절로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성으로 가까이 오르기 위해서는 S자 블타바강을 건너야 한다. 스보르노스티 광장과 크룸로프성을 이어주는 '이발사의 다리'는 슬픈 이야기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어야 할 터이다.


짧은 다리 하나 건너는데 무려 팔백 년을 쓸 셈인지 만곡으로 굽어 흐르는 블타바강 중간쯤에 서서 더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우중(雨中) 풍경은 진채화(眞彩畵) 보단 차라리 담채화가 더 어울릴 듯하다.



크룸로프성에 점점 다가가며 ‘첨탑의 도시’라고 하는 프라하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모양의 하르데크 성탑을 가까이 마주한다. 강렬한 유혹이 해무리인양 성탑을 두른다.


매표원은 발권의 바쁜 와중에도 작은아이와 장난질을 하느라 딴짓거리에 빠져든다. 그 아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귀여워한다고 느끼는지 우쭐대기에 여념이 없다. 다행히 동화 속이라서,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장면이 된다.



성탑은 색감도 그러하지만 스그라피토(Sgraffito) 긁어내는 기법으로 문양을 내고 색채를 둘렀다. 궂은 날씨 아랑곳없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사방으로 뻗치고 있다. 그 아래서 우쭐대는 아이가 성탑 입장에선 가소로울 만도 하겠다.




중세와 현대... 세월 한 묶음



사방으로 탁 트인 둥근 성탑에 오르면 이방인의 영혼을 맑게 해 주려는 무료 서비스인 듯 습기 담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온 천지 담채화를 그려놓은 듯한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사람이 만들어 낸 신선의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보다.



선경(仙境)의 모습을 프로페셔널하게 담아낸 멋진 사진은 셀 수 없이 수두룩 하겠지만, 내 눈으로 담아내는 사진에는 아마 견주지 못하리라.


은빛 눈으로 뒤덮인 겨울 풍경이라치면 더없이 맑은 영혼을 찾겠지만, 우중의 풍경도 나름대로 고즈넉하다.


프라하성 다음가는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세계 300대 건축물이라고도 하더라만, 오후 5시가 지나자 성 내부 관람이 막혀버린다. 차라리 겉만 보는 것이 동화 속에서는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언덕 위 크룸로프성을 벗어난다.


좁은 긴 골목길을 따라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롭고 신기한 흥밋거리가 이어지며 다섯 가지 감각 모두를 즐겁게 해 준다.



아기자기, 올망졸망, 알록달록... 조그마한 뮤지엄, 수비니어가게, 보석가게, 빵가게, 인형가게... 갖가지 그것들에게 눈길을 주고 손길을 준다. 이 또한 동화 속 산책이라 여긴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들어선 레스토랑. 블타바강을 옆으로 끼고 들어앉은 동굴의 모양새다. 특히나 난 (버드와이저의 원조였노라 말하는) 부드바이저 맥주 맛에 흠뻑 젖는다. 벽 너머 블타바 강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트르델니크(Trdelník) 혹은 트르들로(Trdlo)라고 부르는 빵을 사러 줄을 선다. 스핏 케이크 일종이라 반죽을 회전구이통에 두르고 설탕과 호두 믹스를 묻혀 원통형으로 구워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받아 든다. 굴뚝빵이라는 별명이 그럴듯하다.



반나절이면 크게 부족하지 않을 성싶다. 앵두처럼 농익은 붉은 지붕 아래 순수하고도 짙디짙은 보헤미아의 감흥을 안고서 다시 한번 도도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을 내려다본다.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노라 한 줄 평을 강물 위에 띄운다.


나의 조국 제2악장 블타바



가사도 없이 톤()으로 그림을 그린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따로 또 같이 밑그림을 그리고 이내 음을 이어 온갖 선율의 색채를 입힌다.


스메타나의 감상처럼, 블타바강은 작은 두 샘에서 발원하여, 간질간질 작은 시내를 이루어 흐르고, 차가운 강과 따뜻한 강의 두 줄기가 하나로 모여 두구두구 두둥두둥 점점 넓고 깊은 강으로 도도해져 간다. 숲과 관목들을 지나고, 농부의 결혼식 곁을 지나고, 달빛을 받으며 추는 인어들의 원무 주위를 휘돌아 흐르고, 높이 솟은 성과 궁전과 폐허를 지나 여전히 도도하게 흐른다. 제3악장 사르카(Sarka)를 향해 전사처럼 내달린다.


블타바강은 지금 내 눈앞에서 프라하를 향해 흘러간다. 하류의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블타바강 상류의 어느 중세 마을에서는 시간도 잠시 숨을 고르며 홀린 듯 동화 속에 빠진 후에야 비로소 다시 하회(河回)하여 흐른다는 사실을. 그곳에선 시간이 더디 간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제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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