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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Jul 13. 2024

이나리의 붉은 길, 게이샤의 저녁 길

세계여행 에세이: 일본 교토

교토행 신칸센 열차


눅눅한 데다 찌는 듯한 더위까지 올라오는 8월 중순의 도쿄는 몹시 짜증스럽다. 교토(京都)행 신칸센 열차 플랫폼 번호를 기다리는 도쿄역 좁은 대합실은 빈자리 하나 없이 번잡하다. 교토는 더 후텁지근할 터... 벌써부터 목덜미에서 발원한 쉰내 나는 땀들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것 같다.


빠르게 내달리는 노조미 열차에 몸을 반쯤 뉘었다. 고개가 아플 만큼 차창 너머를 바라본다. 두어 시간 이러고 가다 고개를 떨구며 졸기도 하겠다.


光陰矢の如し, ですね  세월 참 덧없군


엊저녁, 아이는 '天気の子'(날씨의 아이)를 다시 보겠다며 신주쿠 피카데리극장에 들었고, 난 길 건너 가부키쵸 도넛가게 창가에 앉아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근처 유흥업소의 '잘 나가는' 듯한 청년들 얼굴이 대형차에 사진으로 실려서는 끊임없이 앞을 오갔다. 귓속으로 에디 히긴스의 Shinjuku Twilight(신주쿠 트와일라잇)을 쏟아부었다. 호스트들 얼굴에서 격세지감이 이탈하더니 재즈 선율을 따라 습한 거리로 흩어졌다.  


'アニメ(아니메) オタク(오타쿠)'가 된 아이는 로망의 빛()을 쫒고, 난 그 빛에 종속된 그림자() 여행을 한다. 일본 땅에서... 내가 빛이던 여행은 쏜 화살()처럼 멀어져간 옛일일 뿐이다.  




千年の都 천년고도 여행


드디어, 교토 도착이다. 생각보다 크고 넓은 역을 빠져나와 도큐호텔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린다.


나라 도다이지(동대사)


다행히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다.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에 압도되었던 (가부키쵸 청년 못지않았을) 리즈 시절로 돌아간다. 지금부턴 한발 내딛을 때마다 시간을 거슬러 보기로 한다. 그림자의 애먼 꿈이다.





"京にても 京なつかしや 時鳥"

 

교토에 있음에도

두견새 울음소리에

교토가 그립구나


방랑시인 마쓰오 바쇼는 하이쿠(俳句) 한 줄 시에 교토 노스탤지어를 온전히 담아냈다. 그 두견새 울음 운지 어언 삼백 년... 그 세월만큼의 여백이 시에 남았다.  


시간을 거슬러 보리라 그림자는 잊지 않고 야무진 꿈을 꾼다.




伏見稲荷大社に行ってください 후시미이나리 신사로 갑시다.


지나던 택시를 세워 탄다. "서울? 거기가 더 덥지 않나?" 나이 지긋한 기사 양반 말 한마디마다 긴장한다. 교토 사람의 평범한 말엔 까다로운 비웃임이 담겨있다지. 다행히 후시미이나리가 금세다.



신사로 오르는 길에 사람이 빼곡하다. 그냥 주황색이라고 하면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강렬한 인상의 토리이(일주문)를 지난다. 마력에 대항하는 색, 이나리 오카미의 힘을 과시하는 색.


물 한 병 사는 걸로 경내 매점 아낙과 다투고 만다. 돈 치르고 병 집느냐, 병 집고서 돈 건네냐의 차이에도 빈정거림이 묻었다.   


伏見稲荷 후시미이나리


마을마다 골목마다 발부리에 차일 만큼 흔한 신사. 숭배 대상도 (야스쿠니 신사의 참전 전사자처럼) 기 백만이다. 그곳에서 종을 울리고 박수를 치며 신과 소통하고, 소원을 빌고, 향로의 연기를 쐬며 무병을 기원한다. 점괘를 보기도 한다.



으뜸가는 신이라면 벼농사와 사업번창의 이나리(벼) 신이다. 이나리 신사 일본 총본산이 이곳 교토 후시미에 있다. 천삼 백 년이나 되었다.


(후시미 마을이 자고로 물 좋고 쌀 좋아 오늘날에도 고급 일본주(사케) 양조로 유명하다. 가까이 오고도 가지 못하는 그림자의 신세가 딱하다.)



이나리 신사에선 여우(키츠네)가 늠름하다. 이나리 신의 전령이다. 이 여우는 유부(아부라게)를 좋아해서 '키츠네우동'은 유부우동이요, '이나리스시'는 유부초밥이다. 부러울 만큼 잘 짜인 각본이랄까.


배가 허할 아이는 이나리스시를 말하고, 속이 허한 난 시원한 '준마이(純米) 다이긴죠(大吟醸)' 사케 한 잔이 그립다.



千本鳥居 천 개의 토리이



토리이(鳥居)는 신성한 곳임을 알린다.


토리이가 빼곡하게 늘어선 길로 들어선다. 신의 길이라지만, 어쩌면 염원하는 이의 길이 맞겠다.


때로는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때로는 그게 '이루어져서' 오랜 세월 토리이를 새로 세웠겠다. 일만 여개 토리이에는 이나리신에게 바라는 수 만 가지 염원이 서렸으리라.


오죽 간절했으면 기둥 하나하나, 가사기(笠木) 가로대 하나하나마다 노랗다 못해 시뻘건 피멍이 들었다.



I wish I knew the contents and I wish the contents. Japanese—

무엇을 바라는지 몰라도, 그 염원 이루어지기를.

아— 일본어

(미국 시인 Kimiko Hahn의 'The Dream of a Lacquer Box' 중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토리이의 길.


숨을 헐떡인다. 잠시 쉴라치면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검은 글자들. 'OO주식회사'... 그래, 이나리신이 제격이겠다.




발길 닿는 곳마다 신과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어 숨을 쉰다. (걔 중에는 인간의 욕심이 우두머리일 게다.)


빼곡히 들어찬 토리이 사이로 나의 삼나무 토리이 하나를 세운다. 붉은 래커를 칠하고 일필휘지 소원을 적는다. 설마, '기원 로또 당첨'... 아니겠지.  


"너의 소원은 무엇이니?" 아이는 답을 하지 않는다.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아직도 "엄마 좋아, 아빠 좋아."의 구시대를 산다.


오늘은 이나리의 붉은 길 위에서 스스로를 또 속인다.


'란덴(嵐電)' 레트로 트램



호텔에서 얼마 걷지 않아 시조오미야역(四条大宮駅)에 이른다. 작은 트램에 오른다.


교토여서 가능한 걸까. 처음으로 노면을 미끄러지던 백 년 전 생김새 그대로인 듯하다. 교토 시내를 지나며, 외곽 마을을 지나며, 학생들이며 교토 권역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 타고 내린다.


“기차도 사람도 오래되면 추억이 되는 거야.”


운전하랴 기적 울리랴 안내방송하랴 요금 챙기랴... 분주한 기관사의 뒷모습이 바라보인다. "よし(요시)!". 소중한 걸 잃으면서도 "신호 좋아!"를 말하던 묵묵한 뒷모습의 '철도원'(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떠올린다.


이십 분 정도만에 아라시야마역(嵐山駅)에 도착한다. 기관사의 안내방송 목소리가 듣고 보니 참 앳되다.


아라시야마치쿠린(嵐山竹林) 대숲



텐류지(天龍寺)를 가로지르면 아라시야마 대숲 가는 길이 더 가까웁다. 입장료를 기꺼이 지불한다.


아니메의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흘러든다. 키 큰 대나무 숲 길을 걷는다.



아라시야마치쿠린 배경의 아니메


더위를 머금은 고요한 공기 속에서 댓잎들이 몽환적으로 떨고 섰다. 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대나무 우거진 숲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 나의 대나무 숲은 대체 어딜까 싶은 거다.


"이번 생은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할까 봐요."


나의 말을 한대도 '괜찮아요'라며 바르르 떨어줄 댓잎이 없지 않을까 불안을 느낀다.


가까운 대나무 마디를 세어본다. 성장통이 한 개, 두 개, 세 개... 그래서 꿋꿋하겠다.


앞서 가는 가족을 쫓아서 속보로 걷는다.


대숲도 덥다.


가츠라가와(桂川)로 내려온다.





'% 아라비카' 커피 한 잔 들고 도게츠교(渡月橋)를 향해 느긋하게 걷는다.


아이가 코피를 쏟는다. 때마침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등을 타고 거침없이 내리던 땀이 순간 움찔해한다.


돌아갈 버스를 기다린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풍경이 된다.


버들잎 늘어진 게이샤의 저녁길


이른 저녁 호텔 앞에 대기하는 택시에 오른다. 기온(祇園)으로 가자니, 가모천(鴨川) 지나 야사카 신사 방향으로 달린다. 기온상점가에 내린다. 천년고도의 운치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녹차아이스크림 사들고 하나미코지 거리(花見小路通)를 걷는다, 홍등 켜진 식당 한 곳의 문을 무심코 열고 들어가 스키야키를 주문한다.


날이 저문다. 기온마치 미나미가와 골목을 헤매듯 걷는다. 드문드문 홍등이 옅은 빛을 낸다. 아직도 유곽(遊廓)거리라 부른다. 어디선가 삼백 년을 진화해 온 두견새가 어느 집 안뜰 버드나무에 숨어 소리 죽여 울 것만 같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기모노를 입고, 어디를 서둘러 가는지, 따박따박 게다 소리 종종걸음 치는 '교토 게이샤(芸者)' 게이코(芸子)가 마주치며 무심히 지나간다. 수습의 마이코(舞妓) 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니, 어느 집 문을 여닫고 사라진다. '마법의 순간'이라 부르더라.



Free Image


"게이샤는 꽃과 같이 아름다운 자신의 길을 지녔고, 버드나무처럼 공손하고 나긋나긋하며 또 강인하다." 화류계(花柳界)에 사는 이들이다. 일본에서조차 게이샤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단다. 그럼에도, 시간이 멈춘 듯, 수백 년 동안 분칠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다른 세상의 삶을 지켜나간다.


변한 것은 '꽃과 버드나무 세계'를 훔쳐보려는 나 같은 이들이겠다.


게이샤의 저녁길을 빠져나와 지나는 택시를 불러 세운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다.




에필로그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교토를 떠나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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