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단편과 상념: 캐나다/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삶이 힘겨워지면 희생양을 찾아 아래를 바라본다
뜻하지 않은 여정에 오른 지 일주일째다. 이게 어디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사회에 국한된 현상이겠냐만은, 비록 사기업의 감사(監査)일지언정 궁지에 몰린 피의자는 꼬리를 잘라내며 도망치는 도마뱀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두 개의 문' 영화의 현실적 효과 때문일까, 진실에 다가서려는 전의(戰意)가 저절로 불타올라 고운 심성을 가려주던 가면을 벗어던지며 페이스 오프(Face-off)에 임한다.
그럼에도, 하루가 마치 세 번의 가을을 지내는 것처럼 길고도 진부하다.
Je Me Souviens (쥬 무 수비앙)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만 봐서는 비가 얼마나 세게 올지 또 언제 갤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는 주말 아침이다. 집 떠나와하는 일도 그러한데 날씨까지 쉽지 않다. 깨끗하지 못하게 된 마음이나 씻어내어 볼까 나이아가라를 향해 길을 떠난다.
빨간 단풍잎 나라의 퀘벡 도로 위로 'Je Me Souviens'이라 적은 번호판을 단 차들이 나를 앞질러 달린다.
'I Remember.', '나는 기억해요.'라는 그 말을 끊임없이 흘리며 달린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야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되지 않겠냐는 꽤나 심오한 자성이다.
내 사람됨이 모자란 것인지... 내 어디서 왔는지를 잊은 적이 많지 않건만, 문득 '지금 내가 제대로 (살아) 가고 있기는 한 것일까?'에 생각이 미친다. 핸드폰에서 띵 울리는 카드사 대출금리 푸시 알림에 그만 짜증을 터뜨리고 만다.
세월 너머 빛바랜 가족사진
큰아이 공갈 젖꼭지 떼지 못한 그 옛날, 서울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다시 뉴욕으로... 그리고는 웬디스 베지테리언 햄버거 하나로 버팔로까지 여덟 시간 길을 버텨낸 탓인지, 세월 흐른 지금에도 장모는 나이아가라 보다 그 동네 한식당 된장찌개 맛을 먼저 기억한다.
그 옛날, 캐나다 땅으로 넘어와 가장 먼저 미국 폭포가 잘 보이게 네 명이 한데 모여 사진을 찍었다. 그 후로 몇 년을 탁상 액자에 끼워 가까운 데 두었다.
오늘 다시 그 미국 폭포를 바라보노라니, 언제부턴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 창고 한구석에서 먼지 앉고 빛바래 가는 그때의 사진 속 사람들이 물보라 속에 발현한다. 공갈 젖꼭지가 위안이 되던 큰아이는 이젠 최신 아이폰 정도는 되어야 조용해지고, 선글라스 잘 어울리던 장모는 심장수술받고 나서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고, 명품 없이도 우아하던 집사람은 남편 출장 갈 때마다 "샤넬 지갑이라도 하나 사 올까?" 소리를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I don't Remember (돌아오지 않는 기억)
오늘은 나이아가라 강을 나 홀로 걷는다. 길이 낯설고, 무지개도 낯설다. 험하게 내리 꽂히는 폭포는 일 년 가도 고작 1센티미터 깎여 나갈 뿐인데, 내 기억은 수 킬로미터는 이미 깎여나간 듯하다.
남편 노릇, 아빠 노릇, 사위 노릇 모두 다 어설펐을 그 시절의 나는 아마도 과도한 책임감으로 어느 것 하나 차분히 바라보지 못했으리라.
우리 다시 못 만날지라도 (기억해요)
좀 더 걷다 보면 기억이 나겠지. 호스슈 폭포(Horseshoe Falls)로 걸어간다. 황조가(黃鳥歌)를 읊조리며 외롭다고 해볼까. 폭포를 바라보는 연인들이 자꾸만 눈에 찬다.
Closed eyes to remember,
기억하기 위해 눈을 감아요
If we never meet again,
우리 다시 못 만날지라도
A perfect memory lives within,
기억은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요
When you close your eyes,
눈을 감는 그 순간
To Niagara Falls you fly.
그대는 나이아가라 폭포로 날아갈 거예요
(JWB의 'A Short-lived Love' 중에서)
오늘의 낯선 연인들을 보며 어제의 가족들을 기억해 본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대던 그때를 그리워해 본다. 너무 멀리 날아온 세월을 원망해 본다.
제일 무서운 일 '잊히는 것'
폭포 아래로 내려가 폭포수의 뒤태를 바라보면 그땐 기억이 나겠지. 'Journey Behind the Falls' 티켓을 끊고, 긴 줄 속에서 입장을 기다린다. 서로를 감싸 안고 숭고한 폭포의 가짜 배경을 뒤로 한채 사진을 찍어대는 지루한 상업적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그날의 가족과 동선을 기억해 내려 애써 본다.
폭포의 가장자리를 지지하는 테이블 락을 뚫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간다. 파르티잔 땅굴을 수색하듯 폭포 뒤를 뒤지며 나아간다. 굉음의 크기를 귀로 재고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희뿌연 물의 벽을 마주하기 위해 줄을 선다. 저승을 앞에 두고 망각의 레테 강으로 뛰어들 순서를 기다리는 망자의 모습 같다.
도도한 강물...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거대한 이리(Erie) 호수를 떠난 물이 나이아가라 강으로 흐르며 또 다른 거대한 온타리오 호수를 향해 속도를 낸다.
폭포 상류에 멍하니 서 있자니, 시작점을 모를 상념들이 느닷없이 거대한 물결을 이룬다. 한 물결 이어 두 물결... 괴롭고 힘든 순간의 기억은 흘러가지 않고, 살기 바빠 잊어버렸던 잊기 싫은 기억은 떠오르자마자 이내 흘러가 버린다. 앞만 보고 살다가 이제 와서 금수저 입에 물고 태어나지 못한 탓을 한다. "누구네는 물려받을 재산이라도 있지, 우리는 열심히 모아야 노후 준비가 그나마 되겠지." 짜증 나던 그 말이 나이아가라 폭포로 떨어지기 직전에서야 자성을 찾는다.
언젠가 같은 자리를 찾아와 같을 듯 다를 이 강물을 바라보며 우리 아이들은 어떤 상념으로 어떤 아빠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지식인의 비평이 폭포 보다 더 크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사소한 일에서조차 사회적, 인류애적 추론을 이끌어낸 멋진 글을 읽는 것보다 폭포로 떨어지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는 이 순간이 더 감동적이다.
사람은 자신이 존경하는 것을 파괴하는 데 능숙하다는 말이 있다. 폭포 주위로 높이 솟은 전망대, 강물을 떠다니는 유람선, 폭포 옆 발전소... 온갖 산만함, 저속함과 부조화가 주위를 둘렀어도, 바라보노라면, 나이아가라는 그 모든 비판을 압도한다.
'더러운 흙탕물에도 연꽃은 피기 나름'이라던 글귀를 떠올린다.
River of No Return (돌아오지 않는 강)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르는 기억의 끝을 쫓아 236미터 높이의 부조화스럽게 솟아오른 스카이론(Skylon) 타워에 오른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옛날 전망대 레스토랑 창가에 앉아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던 (평화로운) 눈동자들을 기억해 낸다.
상류에서 하류로... 끊어질 듯하면서도 도도하게 강줄기를 이룬 나이아가라와 같은 나의 가족들.
폭포 저 위로부터 강물이 흘러 내려와 폭포와 가까워져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흐른다. 콸콸 거리며 흐르다 어느새 천둥처럼 으르렁 거린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창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앞으로 나가려 한다. 그새 강물은 주저 없이 몸을 아래로 내던지고, 무언가 거대한 것이 쿵 하고 끊임없이 떨어지는 충돌의 소리가 전망대까지 들린다. 물보라 구름이 솟아오른다. 큰 충돌 후에 강물은 언제 거칠었냐는 듯 조용하게 다시 흐른다. 그리스 사람들이 말하는 카타르시스가 나이아가라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다.
나이아가라 강물은 폭포를 떠나 다시는 되돌아 오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먼 곳까지 날아와 마지못한 일을 하며 진부해질 데로 진부해진 내 마음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이로운 혼란을 만난 후 조용히 하류로 흐른다. 곧 넓고 넓은 오대호(五大湖) 온타리오 호수와 만날 것이고, 그렇게 평화를 얻을 것이다.
다음 주말에는 다시 집에 돌아가 있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그래도, 얼마 전 난생처음으로 이마에 한 번 맞아본 보톡스 약물의 부작용 덕분인지 얼굴 표정의 가짓수가 크게 줄어 다행이다. 페이스 오프의 긴장이 느슨해질 때면 그나마 표정이 부족한 게 남은 일을 마무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