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단편과 상념: 그리스 산토리니
세월을 낚는 꼬부랑 할머니
거제도 지세포 선창마을 방파제에는 볕 좋은 날이면 아흔을 바라보는 허리 굽은 할머니가 아들이 버려둔 것인지 고물 낚싯대 하나 들고 물고기를 잡겠다며 나와 앉았다. 변변한 미끼도 없이 전갱이며 꽁치며 잘도 낚아 올렸다. 주위에서 한 마디씩 안 거들 리가 없었고, 할머니는 대충 "뭐라꼬 씨부러샀노." 이렇게 대꾸하였다. 외지에서 온 낚시꾼들은 알리가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일찍이 도시로 떠난 후 노인네는 그저 길고 긴 세월을 낚고 또 낚는 것이었다.
사위 휴가에 맞춰 지세포를 찾은 할머니의 늙은 아들은 외손주들 거느리고 호기롭게 낚싯대를 들었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오매불망 월척을 기다리던 아이들은 오래 맞은 바닷바람 탓인지 짜증스레 얼굴만 벅벅 긁어댔다.
"잡았나?"
"한 마리도 없다!"
"내 보다도 못 잡네."
허풍쟁이 외할아버지와 기세등등한 증조할머니 사이의 틱틱대는 대화가 재미난 지 아이들이 대놓고 키득거렸다.
지세포 바다의 유효기간
아흔이 넘도록 바다를 끼고 살았던 할머니는 몇 해전 그 바다에 뿌려졌고, 아이들은 더는 지세포에 가지 못했다.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FC 광팬인 작은아이는 런던행 항공권을 소망하는 만큼이나 이따금씩 그곳에 가고 싶다 하였다.
"거기 이제 아무도 없어. 그 먼데를 가서 뭐 하게." 아빠란 사람은 그럴 때마다 심드렁하게 그 바람을 무시하였다.
산토리니의 파란 메시지
눈보라가 치거나 거센 바람만 불지 않으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방파제에 홀로 나와 앉았겠고, 우리 가족 넷은 12월 31일을 며칠 앞두고 올림픽에어(Olympic Air)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실어 에게해 위를 날았다.
"라라라 라라라라라~ 널 좋아~한다고... 라라라 라라라라라~... 세상을 온통 파랗게 물들이고 싶다."
코발트 블루의 '청(靑)'과 스노우 화이트의 '백(白)'이 강렬하게 부딪히는 산토리니 풍경 속에서 손예진 배우의 화양연화는 8월 한낮 지중해 태양처럼 마구 빛을 뿜어냈다. 그 광고에 매료된 게 엊그제겠거니 싶더니, 어느새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그때의 파란 메시지는 방부액에라도 담겨 있었는지 빛도 바래지 않았다.
우중(雨中)의 아테네를 떠났던 비행기가 세찬 바람에 크게 휘청이며 가까스로 산토리니 섬에 내려앉았다.
산토리니의 유효기간
섬의 북쪽 끝 이아(Oia) 마을에 여장을 풀었다. 12월 31일로 향하는 산토리니는 유효기간이 한참은 지났지 싶었다. 하늘은 창백하고, 공기는 무거웠다. 비수기에도 문을 연 몇 안 되는 가게의 일부 주인들은 때로는 저속하였다.
그렇다 해도, 어쩌지 못하게 즐거운 듯이, 유명해질 데로 유명해진 푸른 돔의 교회들을 하나 둘 찾아서 골목을 돌았다. 그 골목에선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렀고,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따라서 느리게 걸었다.
푸른 돔을 찾아낼 때마다 바다를 바라보던 종탑에선 푸른빛 종소리가 울려 나와 무거운 공기를 뚫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산토리니 가까운 바다를 지나던 배와 그 위에 올라탄 사람들은 종소리가 전해오는 축복에 감사해 마지않았겠다.
가장 번화한 피라(Fira) 마을에서도, 이웃한 메갈로초리(Megalochori) 마을에서도, 페리사(Perissa) 해변에서도 칼데라(화산 분화구)의 검은 본바탕 색과 다퉈 이겨낸 창백한 파랑과 조금은 때 묻은 하양이 제멋대로 한껏 빛을 내었다.
산토리니가 가장 아름다울 때
최고로 아름다울 순간에 한점 바람 없이도 그만 뚝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이라도 되는 양, 산토리니 앞바다는 두꺼운 구름으로 얼룩진 석양을 머리에 이고 기품 있게 어두워져 갔다. 그런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덜 늙은 부모와 더는 어리다 못할 두 아들이 한데 어울려 먼 세상을 돌아다녀 볼 기회가 이젠 정말 몇 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였다. 직감은 곧 심통(Heartache)이었다.
심통의 순간, 에게해를 품은 지중해의 밤은 깊어져 가려하고, 저 멀리 고깃배인지 유람선인지 서너 척의 배들이 산토리니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오갔다. 우리 넷의 시선은 (각자 다를 상념을 품고서) 언제부턴지 줄곧 그 바다와 그 배들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의 산토리니야말로 가장 아름다울 때였다.
지중해 바다 어디선가 물고기를 잡아요
작은아이 학교의 카운슬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장래 희망 상담 자리에서 댁의 자제는 거듭 지중해의 어부가 되겠다고만 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아니, 애가 그리 말할 수도 있지 무슨 호들갑일까 싶다가도 콧대 높은 아랍 왕립학교로선 아이가 공부에 전혀 뜻이 없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금세 시무룩해지고, 곧이어 짜증이 복받쳐 올랐다.
왜 하필 어부일까? 왜 그것도 지중해일까? 풀리지 않는 기초적 의문들은 제쳐둔 채, 이 또한 머잖아 지나가리니 싶으면서도 온갖 걱정과 혼란이 바다밑 진도 7급 지진 후의 쓰나미처럼 거세게 몰려왔다.
"왜 그랬어?"
"몰라."
"진짜 어부가 될 거야?"
"어."
"그건 루저야."
"왜?"
"대체 어부가 뭐람? 왠 지중해?"
"그럼 아빤 내가 뭐가 되길 바래?"
'보세요. 지중해가 아니라면 무조건 혼잡한 대도시에 살아야 하고, 어부가 아니라면 무조건 큰돈 버는 업(業)을 찾아야 하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푸른 지붕의 새하얀 돌집이 아니라면 무조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수십 억 원짜리 아파트에 살아야만 하는 건가요?'
기억해 보면, 어느 날, 아이는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 자기도 다니고 싶다고 했었다. 그럴 바에야... 설령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배경으로 지중해의 물고기를 낚을지라도, 부디 나를 닮아 살지는 말기를 바라는 게 낫겠다. 외할아버지가 월척을 낚아 올리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지세포 그 아이의 심정으로 해 질 녘 만선 되어 돌아올 어부 아들을 기다리는 지중해의 늙은 아빠가 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It’s Okay to Not Be Okay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실패한 내 욕심을 아들은 이루어주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그렇게 해도 '괜찮다'라고 여겼다. 좋은 학교 보내놓았으니 그렇게 바래도 '괜찮다'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때가 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비는 어제를 살고 아이는 내일을 산다
You may give them your love but not your thoughts,
자식에게 사랑을 준다고 해서 생각까지 줄 수는 없어요.
For they have their own thoughts.
그 아이도 자기의 생각이란 게 있기 때문이지요.
You may house their bodies but not their souls,
자식을 기른다고 해서 그 아이의 영혼까지 어쩌지는 못할 거예요.
For their souls dwell in the house of tomorrow, which you cannot visit, not even in your dreams.
그 아이의 영혼은 당신이 꿈에서조차 다가가기 힘든 내일이라는 집에서 살기 때문이에요.
You may strive to be like them, but seek not to make them like you.
당신이 그 아이를 닮아갈지언정 당신을 닮도록 바라지는 마세요.
For life goes not backward nor tarries with yesterday.
삶이란 과거로 향하지 않을뿐더러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 법이랍니다.
You are the bows from which your children as living arrows are sent forth.
당신이 활이라면 그 아이는 당신이 쏘아 날린 화살이지요.
For even as He loves the arrow that flies, so He also loves the bow that is stable.
그분께서는 날아가는 화살도 사랑하시지만 든든하게 받쳐주는 활 또한 사랑하신답니다.
(칼릴 지브란의 시 'On Children' 중에서. 블루밍드림 역시(譯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