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비하_전통주 소믈리에의 우리 술 비하인드
티브이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의 슬픔과 아픔을 표현하는 장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씬이 있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 게슴츠레 풀린 눈과 반쯤 꼬부라진 혀로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혹은 친구가 "너답지 않아" 하면 '나 다운게 뭔데?"라는 대사와 함께 등장하는, 서민들의 아픔과 고단함을 달래주는 한 잔 술.
바로 초록병 소주이다.
얼마 전,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라는 노래가 전 세계 주목을 받으며 한국의 술자리 문화도 주목을 받았는데 자랑스럽게 초록병소주의 목을 탁탁 쳐 한국의 트레디셔널 소주라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반가우면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언제부터 초록병 소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되었을까?
1950년대 양곡관리법이 생겨난 이후,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되면서 고구마, 감자등 전분 성분의 잉여작물을 여러 번 증류시켜 도수 높은 주정을 뽑아내고 여기에 물을 섞어 도수를 낮춘 후 쓴 맛을 가려줄 감미료를 적절히 비율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였다.
당시 어려웠던 경제상황과 맞물려 값싸고 달큼한 소주는 단숨에 국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후 1994년 그린소주가 초록병에 소주를 담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인기를 끌자 어느새 유행처럼 소주회사들은 앞다퉈 초록병을 출시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희석식 소주이다.
소주(燒酒)
소주는 불사를 燒에 술 酒 자를 사용하여 불로 끓여낸 술을 말한다.
현재는 위스키 증류기와 같은 동증류기를 사용하지만 과거엔 소줏고리라고 하는 항아리에 술을 증류하였다.
막걸리의 맑게 떠낸 부분을 이 소줏고리에 넣고 불을 지펴 활활 불사르면 그 위로 수증기가 맺히면서 긴 고리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받아내는 방식이다.
당연히 그 양이 적을뿐더러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기에 소주는 고위관직, 양반들만 마실 수 있었다. 지금의 서민 술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주가 전통소주인
증류식 소주이다.
증류식 소주는 다시 감압식과 상압식으로 나뉘는데 말 그대로 증류기의 진공펌프를 달아 낮은 기압에서 증류하게 되면 감압식, 그렇지 않으면 상압식이 된다. 소줏고리에 끓이는 형식은 상압식이라 볼 수 있다.
감압식의 특징은 부드러움과 깔끔함에 있다. 우리가 익숙한 화요나 일품진로 같이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 감압식이다. 반대로 상압식은 누룩의 향과 불에 탄 거친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이것은 때론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상압식은 그 맛이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가로 비교할 것은 없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술을 찾으면 된다.
희석식 소주라고 품질이 낮고 값싼 술이라 저평가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감압식소주와 상압식 소주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훌륭한가를 재지 않아야 한다. 가격이 높다고 누구에게나 좋은 술은 아니며 가격이 낮다고 모자란 술도 아니다. 다만, 알고 마시는 것과 모르고 마시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초록병 희석식 소주가 익숙하고 유명하지만 한국의 술엔 긴 역사를 가진 증류식 소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tmi
- 희석식 소주의 목을 탁탁 쳐, 윗부분을 따르고 마셨던 것은 캡마개 변경 전 코르크 마개의 부스러기를 제거하는 행위였다.
- 소주를 이리저리 흔들거나 때리는 것은 감미료가 잘 섞이기 위함이다.
- 어느 날은 술이 달고 어느 날은 쓰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기분 탓이 아니라 감미료가 뭉쳐 잘 안 섞인 것일지도 모르니 잘 섞어 마시면 된다.
당신의 인생이 쓴 것이 아니라 술이 안 섞인 것뿐이므로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2013년 정부는' 희석식 소주'와 '증류식 소주'를 규제완화 명목으로 명칭을 모두 '소주'라고 통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