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27
대만에서의 두 번째 집은 사장님이 페북으로 알아봐 주신 쉐하로 결정했다. 룸투어에서 세 번째로 본 집이었다. 집 분위기, 위치, 가격 다 마음에 들었다. 외국인 세입자를 위한 집주인의 특별 배려도 있었다. 아무리 단기 계약이라도 최소 6개월은 되어야 하지만 혹시 4개월도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심지어 보증금도 깎아줬다. 대만에서는 보증금으로 보통 두 달치의 월세를 내는데, 한 달치만 내라고 편의를 봐준 것이다. 대리인 통해서 계약하느라 집주인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에는 특별한 계약서도 썼다. 계약서는 왠지 『논어』가 생각나는 얇은 책자였다. 부동산 중개인이 컴퓨터로 뚝딱 뽑아주던 계약서만 보던 한국인에게는 엄청 생소한 모습이었다.
책자로 되어 있어서 계약 내용도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방 주소며 보증금 가격이며 하는 정보들을 대리인이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 재밌었다. 손으로 쓰는 부동산 계약서라니, 우리나라에선 느껴보지 못한 아날로그 갬성이었다.
집주인의 은혜는 끝이 없었다. 어차피 빈 방이니 바로 들어와서 살라며 계약서 쓴 당일에 열쇠를 건네받았다. 계약일보다 일주일 정도 남아 있었으니 그야말로 공짜로 잘 수 있는 거였다. 이게 왠 횡재냐 하며 넙죽 열쇠를 챙겨들고 바로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드디어 이 징글징글한 타이베이 구석 동네를 떠나는구나! 이삿짐 챙기는 마음이 들떴다. 사실 이사하는 게 설렜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더 이상 지금 사는 쉐하의 집주인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5개월 동안 이런저런 마찰로 엄청 스트레스 받았는데 드디어 해방이라니,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동네에 사는 까만 냥이, 시아오헤이(小黑)랑 헤어져야 한다는 거였다. 시아오헤이는 이 동네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였다. 울면서 산책하고 돌아오던 밤, 알바하고 지쳐서 돌아오던 밤, 기꺼이 등을 내주는 시아오헤이를 쓰담쓰담하며 버텼었다.
운 좋게도 떠나기 전날 시아오헤이와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처럼 시아오헤이의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을 만지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전했다. 한국어라 녀석은 못 알아들었겠지만.
이사는 장장 3일에 걸쳐 진행됐다. 짐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택시비 아끼고 싶어서 매일 조금씩 버스에 짐을 실어 날랐다. 이른바 '몸으로 떼우기'였다. 당시엔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택시비 얼마나 된다고 사서 고생했나 싶다. 무거운 캐리어 옮기느라 양 무릎에 멍까지 들어가면서까지.
그래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버스 의자와 캐리어 사이에 한껏 구겨진 채로 앉아 있던, 무더위 속에서 캐리어 질질 끌고 걸어갔던 그 고생스러운 시간들은 '어떻게든 된다'는 나름대로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면 택시를 탈 거지만.
마지막 짐까지 다 옮긴 저녁, 아낀 택시비로 조촐한 이사 자축 파티를 했다. 이삿날엔 역시 짜장면이지만(!) 이곳은 대만이니 '대만스러운' 음식을 먹기로 했다. 구글 지도로 아직 낯선 동네를 살펴보다 오늘 같은 날에 딱 맞는 메뉴를 찾아냈다. 바로 대만식 닭튀김인 '지파이(鷄排)'였다. 수 년 전 생애 첫 해외 여행으로 대만에 왔을 때 먹고 반했던 나의 소울 푸드!
타이베이 중심지답게 인파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쭉 걸어 지파이 가게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이 살짝 지났는 데도 대기줄이 길었다. 10분 정도 기다린 끝에 받아든 지파이. 새로운 '우리 동네'에서 맛본 이 바삭하고 매콤한 지파이는 이사하느라 소진된 영혼에 기름진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지파이와 함께 곁들인 차(茶)도 딱이었다. 쫀득한 버블이 한 가득 들어 있는 약간 달달한 차는 이곳이 차와 버블의 나라 대만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 대만은 역시 지파이랑 차야!
공원에 앉아 지파이와 차를 먹으며 엄마에게 전화로 이사 완료 소식을 알렸다. "혼자 고생했네"라는 엄마의 말에 눈가가 찡해졌다. 혼자 이사하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이사는 유달리 더 쓸쓸하고 고독했었는데 엄마의 그 한 마디에 외로웠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아, 엄마 보고 싶다.
그래서 홍또우삥(紅豆餅)을 사 먹었다. 외로울 땐 역시 달달한 후식이지. 팥맛보다 강낭콩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홍또우삥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사를 마쳐서 후련하면서도 여러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했다. 새로운 집, 새로운 동네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집 계약도 끝나면 어떻게 될까? 4개월 뒤,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모르겠다. 그냥 홍또우삥이나 먹자.
어쨌거나 이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