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산에서 나눈 땀과 눈물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28

by 끼미


안갯속 대초원 산책


이사를 마친 다음 날, 도리씨와 양명산(陽明山) 나들이를 갔다. 타이베이 북쪽에 위치한 양명산은 대만에 오기 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대만 중국어 교재에 계속 등장했던 산이었기 때문이다. 세뇌의 효과 덕분에 양명산은 등산을 싫어하는 내 마음속에도 즐겨찾기 추가된 지 오래였지만, 막상 혼자 가려니 도저히 엄두가 안 나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추석에 도리씨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도리씨가 자기랑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날 처음 만났는데! 친절한 대만 사람이 으레 하는 말이려나 했지만 도리씨는 결코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각자 점심 먹고 만난 우리는 주말 등산객과 창밖에서 들어온 유황 냄새로 꽉 찬 버스를 타고 양명산을 올랐다. 우리가 간 곳의 정확한 명칭은 '칭티엔강 대초원(擎天崗 大草原)'이었는데, 아쉽게도 드넓은 초원을 보는 데는 실패했다.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는 안개 녀석에게 살짝 섭섭했지만 도리씨와 함께 능선을 따라 정갈하게 깔려 있는 돌길을 천천히 걸으며 양명산의 가을을 만끽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레깅스를 맞춰 입은 도리씨와 나는 우리 운동하는 여자 같다고, 완전 멋있다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사하느라 지친 몸으로 땀 흘리며 걷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도리씨가 옆에서 뿜어내는 밝은 에너지 덕분에 무사히 대초원 한 바퀴를 걷고 하산했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다가 산 중턱에서 내렸다. 도리씨가 나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그전에 등산하느라 납작해진 배를 채우러 돈카츠를 먹으러 갔는데, 도리씨 말에 따르면 예전에 미군 기지였던 곳을 개조한 식당이라고 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좋더라! 분위기만 좋은 게 아니라 돈카츠도 맛있었다. 도리씨와의 첫 만남 때도 같은 메뉴를 먹었는데, 이번에 먹은 건 함께 땀 흘린 전우랑 먹어서인지 아니면 좀 더 비싸서인지 그때보다 더 꿀맛이었다. 등산하면 국룰인 막걸리와 두부김치 부럽지 않았다.




야경, 맥주 그리고 눈물


후식으로 나온 달달한 녹두탕까지 싹싹 긁어먹고 다음 목적지로 갔다. 도리씨가 소개해 주고 싶다던 그 목적지는 바로 '문화대학교(文化大學)'였다. 문화대학교는 대만의 SKY라고 불리는 명문대 중 한 곳으로, 이 학교에도 외국인에게 중국어 가르쳐 주는 어학당이 있어서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마침 도리씨가 문화대 졸업생이었던 것이다. 아니 도리씨.. 엄청 똑똑한 사람이었잖아?!


그렇게 예정에 없던 '도리씨와 함께 하는 문화대 캠퍼스 투어'가 시작됐다. 솔직히 등산하느라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이 행운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대만 친구의 모교 같이 둘러보기', 이건 버킷 리스트에도 없던, 꿈도 못 꿨던 일이었다. 게다가 문화대에 아주 로맨틱한 야경 스팟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도리씨의 눈을 보고 나니 도무지 돈카츠만 먹고 홀라당 하산할 수 없었다.


졸업생의 친절한 소개와 함께 캠퍼스를 잠깐 둘러보고 드디어 야경을 보러 갔다. 대만의 젊은 연인들이 오토바이 타고 사랑을 속삭이러 온다는, 바로 그 야경을.


문화대 캠퍼스에서 바라보는 타이베이의 야경


광활한 하늘 그리고 그 아래 알록달록 반짝이는 별빛들. 타이베이에 산 지 반년만에 처음 보는 야경이었다. 도리씨가 아니었다면 절대 오지도, 알지도 못했을 곳이었다. 찡해진 코끝을 훌쩍이며 도리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도리씨, 진짜 고마워요.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너무 행복해요."

"롱롱씨가 좋아해 줘서 저도 기뻐요."


도리씨와 함께, 간뻬이!

한껏 촉촉해진 감성으로 캔맥주를 땄다. 원래 도리씨는 술을 잘 안 마시지만 맥주 타령하는 나를 위해 함께 마셔주었는데 심지어 도리씨가 사주기까지 했다. 도리씨의 은혜는 정말 끝이 없었다. 나는 대만 맥주, 도리씨는 한국 맥주를 들고 외쳤다.


"건배!"

"간뻬이(乾杯)!"


'건배'의 중국어 표현인 간빠이를 외친 사람은 역시나 나였다.


반짝이는 야경, 시원한 맥주. 속 얘기가 술~술 나왔다. 도리씨와는 겨우 두 번째 만난 사이지만 20년 지기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이 저절로 입 밖에 나왔는데, 그러다 그만 울어버렸다. 대만에 오기 전 나를 떠난 고슴도치가 보고 싶다면서. 남 앞에서 고슴도치 얘기하면서 울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걸로 울어서 미안하다는 나를 도리씨가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괜찮다는 도리씨의 목소리에서도 울음기가 묻어 나왔다. 휴지로 눈가를 닦은 도리씨는 귀여운 한국어로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저는 롱롱 이해해요. 제 첫사랑도 갔어요, 하늘나라. 저도 보고 싶어요."


늘 밝고 에너지 넘치는 도리씨에게도 나처럼 이별의 아픔이 있었다. 도리씨가 쉬운 중국어로 얘기해 줘도 완전히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나도 아주 가깝게 지냈던 이성 친구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적이 있어서 도리씨의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헤아려졌다. 이번에는 내가 도리씨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울어도 괜찮다고, 토닥토닥.


그날 밤, 오랜만에 푹 잤다. 나를 이해해 주는,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몇 달 동안 잠을 설쳐온 이에게 다정한 수면제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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