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30
"역시 맥주엔 마라 새우깡이지. 캬.."
11월의 마지막날.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낯선 방 안에 앉아 캔맥주를 땄다.
오늘의 맥주는 대만의 카스 같은 존재인 '대만 맥주(台灣啤酒) 클래식'. 맛은 카스에 못 미치지만 마트에서 세일하길래 골라왔는데 다시 마셔봐도 역시 밍숭맹숭하다.
그래도 괜찮다. 나에겐 마라맛 새우깡이 있으니까! 한국에서도 맥주 안주로 매운새우깡을 자주 먹었는데, 역시 사는 곳은 바뀌어도 사람 취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마라맛 새우깡은 매운새우깡보다 훠어어어얼씬 더 맛있어서 밋밋한 대만 맥주도 술술 넘어간다.
오늘의 혼술은 조촐한 기념 파티다. 워홀 비자로 대만에 머무를 수 있는 총 360일 중 딱 절반이 지난 시점, 이역만리 타지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있음을 축하하는 자리. 코로나 때문에 집콕만 해야 했던 초기 3달은 3년처럼 느껴지더니, 2분기의 세 달은 3일처럼 휘리릭 지나가 버렸다. 어학당, 알바, 여행, 친구 사귀기, 이사... 맥주 한 입에 웃었던 기억, 새우깡 한 입에 울었던 기억이 과자 봉지에 그려진 새우 등을 타고 까오티에(대만의 KTX, 高鐵)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180일 동안 뭘 했나, 이게 대만 워홀이 맞나, 잘하고 있는 건가...'
알코올의 힘으로 몰랑몰랑해진 마음을 뚫고 바쁘다는 핑계로 지하에 묻어뒀던 걱정들이 마그마처럼 분출했다. 어딘지 부족한, 흡족스럽지 않은 나의 대만 워킹 홀리데이. 벌써 절반이나 지났는데, 이제 반 밖에 남지 않았는데, 계속 지금처럼 지내도 되는 걸까, 뭘 더 해봐야 하는 걸까. 맥주캔이 가벼워질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나는 왜 이럴까?'
피할 수 없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사실 만족스럽지 않은 건 대만 워홀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180일의 대만 워홀 생활 동안 남들처럼 어학당 통쉐들과 친해지지 못한 것, 언어교환 어플로든 무엇으로든 (도리씨 빼고) 대만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 알바에서도 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한 것, 그 모든 아쉬움은 나의 문제였다.
소심한 나, 쫌스러운 나, 이기적인 나, 제멋대로인 나...
대만 와서 사귄 한국인 동생 J 그리고 유일한 대만 친구인 도리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홀로 외로워하는 나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손 내밀어준, 고마운 은인들. 분명 알면서,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왜 자꾸만 이리저리 따지고 인색하게 구는 건지.
얼마 전 J와 대만식 술집인 러차오(熱炒)에 갔던 날, 도리씨와 함께 단수이 바다에 갔던 날이 생각났다. 내가 밥 샀어야 했는데, 더 다정하게 대했어야 했는데... 이미 몇 번째 하는 후회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죽기 전에 전 재산 탕진하겠다는 각오로 온 거였는데, 이렇게나 쪼잔하게 굴고 있다니. 내가 보기에도 참 한심했다.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이 가난한 마음은 남은 180일 동안 고쳐질까?
어느새 비어버린 맥주 캔을 아쉽게 흔드는데, 얼마 전 어학당 수업에서 선생님이 알려주셨던 표현이 떠올랐다.
'금붕어 뇌(金魚腦, 찐위나오)', 뒤돌아 서면 까먹는 사람을 놀릴 때 쓰는 표현이랬다. 우리나라에서도 '붕어 대가리'라고 하듯이 붕어는 대만에서도 바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불쌍한 붕어.
아, 금붕어가 되고 싶다...
인색한 것도 문제지만 자꾸 지난 과거를 곱씹는 것도 문제다. 고치지도 않을 거면서, 이 짠순이 금붕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애초에 큰 계획 없이 무작정 온 워홀이었다. 계획이 있다면 중국어 배우고 여행 다니고 알바하고 이 정도였는데, 12월부터는 '중국어 배우고'가 사라질 예정이었다. 다음 학기에는 어학당 수업을 듣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중국어가 크게 늘지도 않았고 통쉐들이랑도 친해지지 못했고 괜히 공부하느라 스트레스만 받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어학당 체험은 한 번으로 끝내기로 했다.
이제 남는 게 시간이었다. 평일 저녁에는 지금처럼 알바를 하겠지만, 해가 떠 있는 낮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다시 대만 친구 사귀기 대작전에 돌입해봐야 하나 싶었지만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닌 일 같아서, 좀 더 솔직히는 귀찮아서(이런 태도도 고쳐야 한다는 건 알지만...).
지금까지는 어학당 수업 끝나면 맛집 찾아가서 점심 먹고 도서관이든 카페든 가서 숙제하고 그러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뭘 해야 할까? 두 달 뒤에는 다른 도시로 떠나고 싶은데, 그전까지 타이베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난 여기에서 뭘 하고 싶은 걸까?
맥주도, 새우깡도 다 먹었으니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내일 아침이면 금붕어가 되어 있겠지.
♥읽어주시는 분들께♥
안녕하세요, 끼미입니다.
어느덧 <대만에 살러 왔습니다> 시즌 2의 마지막 글이에요.
마음 속에 남아있던 대만 워홀 생활의 아쉬움을 풀고자 시작한 연재인데
많은 분들께서 읽어주시고 좋아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많이 걱정했고 지금도 쓸 때마다 '이게 맞나?' 싶지만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이 계셔서 무사히 긴 레이스의 반환점에 도달할 수 있었어요.
시즌 3부터는 대만 여기저기 구경 다닌 여행기를 위주로 올릴 예정이니
모쪼록 즐겁게, 가볍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즌 2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